영화 ‘반칙왕’에서 주로 맞고 엄살 피는 역할로 나왔던 프로레슬러 체구는 생각보다 컸다. 키 180cm, 몸무게 105kg. TV 오락프로그램이나 프로레슬링 중계 화면에서 과장된 몸짓에 모자란 듯 쾌활하게 울고 웃어 실제 성격도 그러려니 했는데 청색 빵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얼굴 표정이 점잖다. 인터뷰 분위기도 띄울 겸 호기심에 “헤드록(head lock) 그거 진짜 아프냐”고 농을 쳤더니 “이리로 잠깐 와보라”고 했다. 프로레슬러는 모자를 벗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빡빡머리를 드러냈다. 갑자기 팔과 가슴 사이로 기자 머리를 끼고 관자놀이 부근을 조였다. “아! 그만! 그만요! 악! 머리 깨져요!” 고함을 치자 10초 뒤 스르르 머리를 풀어줬다. “그거 중간 정도 힘 준건데. 더 아프게 할 수도 있어.”

26일 프로레슬러 '노지심(본명 김주용)'을 만났다. 경기도 부천으로 기자를 부르길래 그 지역에 있는 '이왕표 체육관'에서 인터뷰를 할 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노지심 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체육관을 옮기는 중이야. 운영비 문제도 있고. 5월쯤이 되면 다시 문을 열 텐데, 장소 구하기가 쉽지 않네."
나이를 묻자 "40대 라고만 써 달라"고 했다. "실제 나이를 밝히면 운동할 때 상대방이 얕보잖아." 기사를 읽는 사람은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고 하자 "그건 알아서 판단할 문제"란다.

◆ '주먹 세계'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이왕표 선배님께 잡혀 왔지"

-어떻게 프로레슬링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전남 고흥 마도 소재의 섬이 있는데 '연홍'이라고. 내 고향이야.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지. 원래 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중학교 때 한창 프로레슬링이 대인기였지. 흑백TV 화면에 나오는 '김일 박치기'가 그렇게 멋있는 거야. 큰 거구들이 링에서 맞아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서고, 그런 것들이 신기했던 거지. 그래서 부모님을 졸랐지. 저거 하게 해 달라고."

-부모님 반대가 심했지요.
"물론이지. 그래서 중학교를 마치고 가출을 했어. 강원도 태백에서 중국 음식점 배달을 하면서 돈을 모았지. 체육관 다니려면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결국 부모님도 허락할 수 밖에 없었지."

-그 후 고(故) 김일 선생님을 만나셨지요?
"부모님과 함께 만났지. 선생님이 '아마추어 레슬링을 배우고 와라' 그러는 거야. 그래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같이 하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일단 허락하신 걸로 알고 서울 정동에 있던 '김일체육관(문화체육관)'으로 와 버렸지. 그 후 오전에는 김일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오후에는 을지로에 있는 아마추어 레슬링 체육관을 다니는 생활을 했어."

-전국 학생 신인선수권과 전국체전 서울예선대회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셨죠.
"그때 아마추어 코치가 '너 시합 한 번 나가지 않겠냐' 그러더라고. 시합 나가서 1등 하면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준대. '좋습니다'하고 나갔지. 평소 하루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씩 연습을 했으니 체력이 엄청나지 않겠어? 그래서 금메달을 따고 학교에 들어갔지. 고교 1학년 때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6개 정도 땄어. 그때 실력이 좋으니까 고등학교 3곳을 옮겨 다녔어. 스카우트된 거지."

-그렇게 실력이 좋으셨으면 올림픽 출전은 생각 안 해 보셨어요?
"방콕아시안게임(1978년) 대표선발전을 앞두고 모기향 꽂이를 밟아서 발바닥에 부상을 입었어. 운명이지 운명. 프로레슬링 하라는 운명. 그때 나한테 졌던 사람이 나가서 은메달인가 땄을 거야."

-프로레슬링 데뷔전에서 일본 선수한테 참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가 1980년이던가, 부산 구덕 체육관에서 일본 선수하고 붙었지. 링 위에 올라갔는데 눈 앞이 캄캄해. 다리도 덜덜 떨리고. 정말 엄청나게 맞기만 했지. '야, 이게 정말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구나' 더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도, 링 위에서 계속 떨리더라고. 우리나라 선수는 괜찮은데 특히 외국 선수한테는 안 돼. 결국 외국 선수 상대로는 데뷔 2년 만에 첫 승을 거뒀어."

-소위 '주먹 세계'에서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습니까?
"왜 없어, 있었지. 운동에도 권태기가 있잖아. 그때 프로 입문한 지 몇 년 안 됐을 땐데, 그 쪽 세계에 있는 친구 선후배가 '야, 여기 괜찮은데 와서 같이 있자' 그러더라고. 그럴 찰나에 이왕표 선배님한테 잡혀 왔지. 만 하루도 못 갔어. 그리고 나서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경기하고 오니까 더 이상 부르지 않더라고."

-링 위에서 주로 때리기보다 많이 맞는 편이죠?
"예전에는 많이 맞았지. 연습 때도 맞고, 실전에서도 맞고. 허리뼈도 나가고, 갈비뼈도 나가고. 목도 다쳐봤고, 피도 많이 흘려봤고. 다리에 깁스도 해 봤지. 원래 프로레슬링은 맞는 것부터 배워요. 그러면 요령이 생겨. '내가 이렇게 때려야 상대방이 덜 아프겠구나, 더 아프겠구나' 이런 거."

-가족들이 맞는다고 반대는 안 했나요?
"딸이 셋 있는데 지금 하나는 출가했고, 나머지 둘은 대학생이야. 애들이 어렸을 때 '왜 아빠는 맞고만 다니냐' 하지 말라고 그랬지. 중학교 때 이후로는 경기를 안 왔어. 이제는 다 이해하지."

-다리에 깁스를 했다가 김일 선생님한테 "운동선수에게 깁스가 웬 말이냐"고 혼나서 그 자리에서 깁스를 풀었다고 들었습니다.
"응. 맞아. 그때 오른쪽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찾아가 깁스를 했었지. 사실 김일 선생님께 혼나서 깁스를 부술 때는 다리가 거의 다 나았을 때였어. 허허허. 프로레슬링 선수들의 자세라고나 할까, 그런 걸 지적하셨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김일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지 않아. 때로는 아버지 같았는데. '힘들지 이놈아! 훈련은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하는 건 아니다' 그런 한마디가 나한테는 힘이 됐지."

노지심은 상처가 난 머리를 보여줬다. 박치기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쇠기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하도 매트에서 구르다보니 두 귀도 심하게 일그러졌다.

◆ 이혼 후 머리 깎고 '노지심'으로 활동

노지심은 데뷔 이후 한동안 본명 ‘김주용’으로 링에 올랐다. 당시엔 머리도 길었다고 했다. 하지만 1998년 이혼을 하면서 그는 머리를 잘랐다.

“왜 이혼했냐고? 그냥 성격 탓이라고 해 둘게. 큰 충격이었지. 딸 셋을 데리고 혼자서 살아야 했고.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어. ‘새로 태어나야겠다’ ‘다시 한번 태어나야겠다’ 생각했지. 그래서 용기를 내서 머리를 잘랐지. 예전에 머리 길 때 찍었던 사진은 다 불태웠어. 혹시 딸들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네.”

그때 이름도 '노지심(魯智深)'으로 바꿨다고 한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중 이름과 같다.
"이왕표 선배님께서 수호지란 책을 건네시면서 '여기에 네 캐릭터가 있을 거다' 그러시는 거야. 그런데 책에서 노지심이란 사람이 나하고 똑같은 성격의 소유자더라고. 당시 지인들도 '너는 노지심이 딱이다' 그랬지. 아는 스님한테도 '지장이 없겠습니까' 물어봤더니 괜찮대. 인상도 험하게 쓰려고 계속 연습하고. 그때는 구레나룻도 있었는데 지저분해서 콧수염만 기르기 시작했지."

머리를 깎은 이후 노지심으로 이름도 바꾸면서 소위 말해 뜨기 시작했다. 스승인 김일처럼 박치기도 그의 주무기 중 하나가 됐다. 그는 이마에서 머리 위까지 세로로 뻗은 여러 개 상처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김일 선생님 박치기가 셌잖아. 한 번 맞으면 상대 선수가 자지러져 버려. 그래서 나도 박치기 연습을 좀 했지. 김일 선생님 비디오를 보고 폼도 익히고, 쇠기둥을 받아도 보고. 정말 아프더라고. 그런데 정말 연습을 하니까 강해지더라고. 그 다음에 김일 선생님 병원에 계실 때 찾아가서 그랬어. ‘선생님, 제가 박치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했지. 하니까 괜찮아. 관객들 호응이 좋아. 김일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들 향수도 느끼게 되나 봐.”

TV 쇼 프로그램이나 광고는 물론 영화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반칙왕(2000년), 천사몽(2001년), 클레멘타인(2004) 등이 그가 나온 영화다.
"학교 근처에 가면 난리가 났지. 숨어 다녀야 했어. 모자에 마스크까지 해도 어떻게 알아봤는지 사인해 달라고 난리가 나. 지금도 인기는 있지만 예전에는 꼬마들한테 눌려서 일어나지도 못했어. 또, 영화 '영구와 땡칠이'의 쌍라이트 형제하고 날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말할게. 나는 거기 안 나왔어. 허허허."

그가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인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은 이미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지심은 "그래도 지방시합을 가면 흥행이 된다"고 애써 부정했다가 "프로농구, 프로축구, 프로야구 등 볼거리가 많아져서 침체가 왔다"고 말했다. "요새는 TV중계를 안 하니까 광고도 안 들어와. 옛날에는 노지심 후원회도 있고, 개인 스폰서도 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다 힘들잖아."
또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는 말도 했다. "옛날에는 밥도 하고, 빨래, 청소, 잔심부름… 하라는 거 다했어.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기술도 배울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은 그런 거 안 시키는데도 사람이 없어. 하려고 하는 사람만 있으면 가르쳐주고 그럴 텐데. 나는 이제 마음을 비워버렸으니까."

◆ "그게 왜 쇼야? 스포츠니까 규칙이 있는 거지"

-경기는 얼마나 뛰십니까?
"옛날에는 한 달에 일주일 정도 경기를 했는데, 요즘은 일 년에 몇 번 못해."

-그걸로 돈벌이가 되십니까?
"프로레슬링을 밥줄로 삼으려 하면 오산이지. 미국이나 일본 선수들도 꼭 프로레슬링만 하는 건 아니야. 다른 사업으로 돈을 벌기도 하지. 내가 빠져서,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그래야 보람도 생기지."

-다른 사업해서 돈 좀 버셨습니까?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레스토랑, 호프집, 최근에는 헬스클럽도 했는데…. 원래 잘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잖아."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생각되니까 이종격투기 쪽으로 사람도 몰리고 흥행도 되는 건 아닐까요?
"(목소리가 격해졌다.) 어떤 양반이 실력으로 안 되니까 쇼다 그랬는데 그건 실력이 없어서 진 거요. 관중들한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는 쇼지만 기술하고 승부는 쇼가 아니야. 낙법 하나만 봐도 그래. 낙법 하는 것도 쇼라고 하는데, 낙법을 하면 엄청 아파. 혼자서 떨어지는 것도 아픈데 상대방이 자신을 매치잖아. 실제로 아프니까 표현을 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게 쇼야?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잡고 부러뜨릴 수 있어요. 하지만 상대 선수를 보호해야 하잖아. 또 반칙을 하기도 하지만 허용한 범위 내에서 해야 해. 프로경기니까 서로 지켜야 할 룰이 있는 거지. 왜 기술을 보지 못하고 그런 소리만 하는지…."

-어차피 승부가 정해져 있다는 주장도 있죠.
"그런 건 없어. 승부보다 내용이 중요한 거지. 정말 내가 이기고 싶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수 있어.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어. 나는 10번 시합을 하면 이기는 시합이 거의 없었어. 100전 100패를 해도 '저 선수 기량 좋다', '이번 시합 좋았다' 그런 얘기를 들어야지."

-링 위에서 격하게 싸웠다가도 경기가 끝나면 서로 웃고 화해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스포츠잖아. 링 위에서 싸운 걸 가지고 감정을 가지면 안 돼. 상대방이 좀 세게 때리고 심판 안 볼 때 급소를 때리면 감정 생기지. 그래도 그 자리에서 안 풀면 평생 오해가 돼. 나중에 다쳐. 적을 만들지 말아야지."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였습니까?
"특별하게 무슨 경기가 생각나는 건 아니고…. 매 시합이 그래. 요즘에는 시합 중에도 관중들 얼굴이 하나하나 보여. 내가 하는 경기에 관중들이 같이 즐거워하고, 흥겨워하고, 기뻐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그게 즐겁지. 지금도 시합을 하면 관중하고 같이 즐기려고 해."

노지심은 "링 위에서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이 인기를 끄는 시대가 꼭 올거야. 그때까지는 프로레슬링을 계속 해야지."

◆ "링에서 관중하고 함께 즐길 때가 가장 보람있지"

한창 얘기하는데 심하게 일그러진 양쪽 귀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그의 스승이자 선배인 이왕표 선수 때문에 생긴 흉터다.
 
-이왕표씨께서 훈련을 심하게 시키셨죠?
"옛날에 엄청 무서웠지. 훈련을 시키는데 하도 매트에 귀를 긁어서 물집도 생기고 부풀어 올랐어. 붓기를 뺀 뒤에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귀가 이렇게 됐지. 또 맞기도 많이 맞았어. 나 잘하라고 그런 거니까. TV에 출연했을 때도 그런 게 재미가 있었지. 많이 아프지도 않고 감정도 상하지 않아."

-김일 선생님 이후 이왕표씨가 줄곧 우리나라 프로레슬링계를 주름 잡았는데 2인자에 대한 회한 같은 건 없으세요?
"그런 건 없어. 영화를 보면 주연도 혼자 만의 주연이 아니잖아. 조연이 있어야 주연도 뜨는 거야. 나는 나로서 만족을 하는 것이지. 1인자 하면 뭘 해? 머리만 아픈 것이지. 이왕표 선배님은 보스답게 그런 걸 잘해요. 나는 거기에 뒷받침을 해 드리고. 지금도 바늘과 실의 관계야."

인터뷰를 마칠 때쯤 노지심은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이 다시 인기를 끄는 시대가 꼭 온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경우 요즘 이종격투기하고 프로레슬링하고 인기가 비슷하다고 하더라고. 우리나라에서도 다시 인기를 끌 때까지는 절대 링을 못 떠나지. ”

인터뷰 하루 뒤인 27일 노지심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거 알아? 4월 말쯤에 서울 잠실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해. 나도 거기 나가. 그거 꼭 기사에 써 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