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허(殷墟) 유적지인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부근에 탕음현(湯陰縣)이 있다. 골동품 상인들이 갑골문의 출토지라고 속여 많은 사람들을 허탕치게 했던 곳이다. 탕음현은 원래 남송(南宋) 장수 악비(岳飛:1103~1142)의 고향으로 유명해서 사당인 악비묘(岳飛廟)가 있다. 1129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남하했을 때 강경주전론을 펼쳤던 인물이 악비이다. 악비의 대척점에는 온건주화론을 펼쳤던 진회(秦檜:1090∼1155)가 있었다.

'송사(宋史)' 악비 열전은 사신은 평가한다(論曰)에서, "악비와 진회의 세력은 양립할 수 없었다"면서 "제갈공명의 풍모가 있던 악비는 진회에 의해 죽고 말았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두 노선 중 어느 것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악비 사후 300여 년 후에 발생한 '토목(土木)의 변(變)'은 악비를 한족(漢族)의 민족영웅으로 떠오르게 했다.

명나라 영종(英宗)은 1449년 북방 몽골제국의 야선(也先)이 남하하자 친정을 단행했다가 하북성(河北省) 회래현(懷來縣) 부근의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가 되고 만다. 뒤이어 즉위한 경제(景帝)가 이민족과 맞서 싸운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띄우면서 1450년 악비의 고향 탕음(湯陰)에 사당을 조성했다.

사당 입구에 쇠로 만든 오궤상이 눈에 띄는데, 진회 부부 등 주화파 5명이 무릎 꿇고 있는 철상(鐵像)이다. 1952년 11월 마오쩌둥(毛澤東)은 북경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탕음현에 특별히 정차해 악비를 기렸는데, 지금도 사당 안에는 마오쩌둥의 시찰 장면 그림 옆에 '애국주의 교육기지'란 글씨가 쓰여 있다.

그런데 동북공정 등을 진행하며 중화민족의 개념에 한족(漢族) 외에 몽골·만주·조선족 등도 모두 포함된다고 재규정하다보니 만주족과 싸운 악비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데 논리적 모순이 생겼다. 그래서 악비를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규정하자 한족(漢族)들 사이에서는 한때 거센 반발이 일었으나 그것이 제국주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필자가 최근 악비묘를 방문했을 때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현실의 이익을 가장 높이 치는 중국인다운 처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