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이태석(22)씨는 ‘헌팅(길거리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행위)’을 통해 지금의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지난해 여름 서울 신촌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이상형의 여성을 만나 전화번호를 물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이씨가 가벼워 보여 처음엔 거절했던 여성은 남자 쪽의 적극적 구애로 곧 그의 연인이 됐다. 이씨는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말을 걸 용기가 필요하긴 하지만 헌팅은 마음에 드는 이성과 사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남녀 만남 신(新)풍속
“원하는 이성 직접 찾겠다” 젊은이들 거리로
케이블 채널에선 중계하듯 헌팅 과정 보여줘
적극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성과 만나는 방법으로서의 미팅이나 소개팅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최근에는 지인을 통해 이성을 소개 받기보다는 이씨와 같이 자신이 원하는 이성을 찾기 위해 직접 거리로 뛰어드는 사람이 늘고 있다.
얼마 전 케이블채널 코미디TV는 ‘리얼중계 씨티헌터’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스포츠 중계 형식을 빌려 로드(길거리)헌팅의 세계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방영 당시 두 번째 시즌이 나올 정도로 두터운 시청자층을 확보했다.
가장 대중적 매체인 TV에서조차 프로그램 소재로 등장할 만큼 헌팅은 20~30대 젊은이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헌팅에 능숙한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픽업아티스트(pick-up artist)’의 등장은 헌팅이 이미 젊은층의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윙, 오프너, IOI… 암호나 다름없는 신조어 쏟아져
‘말 거는 법’ 등 실전법 알려주는 강좌에 수백 명 몰려
젊은이들의 헌팅열풍은 인터넷상에서도 뜨겁다. 사이버 공간을 떠도는 각종 헌팅 관련 신조어가 그 예. 재미있는 것은 헌팅을 대하는 이들의 인식이 과거처럼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픽업아티스트만 해도 기존 대중매체 등에서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던 바람둥이나 제비, 작업남 등이 지닌 부정적 어감이 강하지 않다. 대신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예술(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라는 새로운 평가가 더해졌다. 헌팅 관련 은어는 이 밖에도 윙(wing), 오프너(Opener), IOI (Indicator of Interest) 등 다양하다. 본래 뜻을 모르는 일반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영어 조합이나 약어가 대부분인 것이 특징이다.
회사원 방모(23)씨는 지난 1월 ‘쿨가이즈 차밍스쿨(cafe.naver.com /wearecool.cafe)’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이 커뮤니티에는 방씨 외에도 약 5000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이곳에서는 헌팅 관련 기본 정보를 비롯해 맛집, 분위기 있는 데이트 코스, 최신 유머, 심리 테스트 등 다양한 정보를 담은 게시판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이성 고민 전용 상담 공간이 형성돼 헌팅에 대한 전반적 컨설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헌팅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한국픽업아카데미(www.kpua. co.kr) 같은 곳도 있다. 한국픽업아카데미 운영자 P씨는 주말마다 유료로 헌팅 기술에 관한 이론 및 실전 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수강생은 300여명. 강의 주제는 '이성에게 해주면 좋아하는 말' 등 헌팅을 위한 기본 테크닉에서부터 인간 심리와 잠재의식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는 바람둥이나 제비와 다르다…
상대 마음 사로잡는 인간관계의 달인”
로드 헌팅은 장소에 별다른 제약이 없지만 클럽 헌팅의 경우서울 신촌이나 홍익대 근처, 강남역, 압구정동, 신천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 밀집 지역이 주무대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헌팅 하면 속칭 바람둥이나 제비를 떠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픽업아티스트들은 스스로를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잡는 사람’ ‘자신이 지닌 후천적 매력을 지속적으로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인터넷상에서 픽업아티스트로 유명한 닉네임 ‘팬케익’씨와 ‘또랑우탄’씨는 “명품이나 와인, 파스타, 영화 등 여성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지녀야 이성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헌팅은 잘난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도 이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잘생기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은 헌팅 기술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기술을 익히지 않아도 여성들이 따르니까요.” 그들이 말하는 픽업아티스트란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후천적으로 익히는 사람’이다.
20~30대 남성 매달 모여… 닉네임 사용“여성은 접근 금지”
경험담 발표하고 조언, 100만원짜리 특강도… 모임 후 실전 돌입
3월의 첫째 주말이었던 지난 1일 저녁,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실내 포장마차에서 한국픽업아티스트협회(KPUA·Korea Pick Up Artist) 정모(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정기 모임)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인원은 25명 정도. 한국픽업아티스트협회의 경우 여성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기자의 경우 협회의 협조를 얻어 다른 회원들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이날 참석자 역시 대부분 20~30대 남성이었다. 대학생에서부터 군인, 회사원, 전문직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다양했다.
이날 모임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회원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온라인에서는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이들은 좀처럼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프라이버시 유지를 위해 모든 대화와 자기소개가 닉네임(별명) 위주로 이뤄지는 게 특징. 대화 주제는 대개 자신의 헌팅 경험 발표와 이에 대한 주변의 조언이다. 일부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술 기법 등 각종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날 모임 참석이 처음이라는 회원 정모씨가 “어깨가 좁아 고민”이라고 하자 참석자 중 누군가가 “어깨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관련 동작을 가르쳐줬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라는 한 회원은 작은 키를 감쪽같이 커버할 수 있는 키높이 구두를 추천 받기도 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성공적인 헌팅을 위해 픽업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적게는 6만원, 많게는 100만원에 이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픽업아티스트의 강의를 들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
이런 모임이 활성화되는 이유가 뭘까. 운영자 P씨는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연애 상담 패턴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의 연애 관련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대화하며 해소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달라요. 그런 얘기 자체를 꺼리거나 단순히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여자 친구 생겼다’고 하면 ‘예쁘냐’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냐’ ‘잤냐’ 등으로 대꾸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우리 모임의 경우, 남성끼리 모여 편안하고 진솔하게 이성에 대한 고민이나 상담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고요.”
저녁 8시부터 시작된 모임은 네 시간 넘게 이어졌다. 자정 무렵이 되자 모임 장소를 빠져 나온 회원들이 인근 거리나 클럽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클럽 헌팅’이나 ‘로드 헌팅’에 나서는 참이다. 정모가 ‘이론과 정보 교류의 장(場)’이라면 이후 시간은 철저히 ‘실전 적용의 장(場)’인 셈이다.
“‘하룻밤 상대’ 구하려는 목적은 아닌지
외모로 여성 등급 나누는 행태도 비윤리적”
픽업아티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팅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 헌팅은 길거리나 클럽 등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른바 ‘ONS(원나잇스탠드·One Night Stand·하룻밤의 정사의 줄임말)’.
실제로 취재 중 만난 자칭 픽업아티스트 K씨는 “클럽에서 헌팅을 통해 만난 여성과는 잠자리를 함께한 이후 대개 연락을 끊는다”고 밝혔다. 헌팅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당일간지(만난 당일 원나잇스탠드가 가능한 날)’나 ‘홈런(원나잇스탠드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 등의 은어를 사용하며 하룻밤을 함께할 여성을 구하는 게시물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헌팅 현장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외모나 체형 등으로만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헌팅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여성 관련 용어들의 수준은 이런 우려를 더해주고 있다. 특히 여성의 외모를 등급별로 나눈 표현, 이를테면 오우거(괴물 같은 여자), 덜덜덜 A급(가슴이 떨릴 정도로 괜찮은 여자), HB(Hot Body) 등은 상대로 하여금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게 할 정도다.
대학생 박상은(20)씨는 헌팅에 대해 “순수하게 가슴이 떨리고 사랑에 빠진다면 모르겠지만 외모만으로 여성의 등급을 나누는 행위는 비윤리적”이라며 “여성을 등급으로 매기는 남성들이 자신의 누나나 여동생, 훗날 태어날 딸이 다른 남성에 의해 등급이 매겨진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정유성 서강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헌팅이 새로운 만남의 방법으로 자리 잡은 세태에 대해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요즘 젊은이들에겐 당연한 현상”이라면서도 “여성의 외모를 등급으로 매겨 폄하하고 쇼핑하듯 사람을 골라 만나는 행위는 인간 본성과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옷차림은 튀지 않고 고급스럽게
시작은 길 묻기 등 자연스럽게
작업용 멘트 금물… 외모 칭찬 반드시
헌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로드 헌팅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 ‘리얼중계 씨티헌터’ 방영 내용 중 실패 사례 하나를 선정, 한국픽업아카데미 인기 강사 ‘또랑우탄’씨에게 조언을 구했다.
■ 상황
서울 강남역 주변, 배우 지망생인 준수한 외모의 남성이 로드 헌팅을 시도한다.
남: 저기요….
여: 네?
남: 잠깐만요. 바쁘세요?
여: 왜요?
남: 혹시 영화 좋아하세요? 공짜 영화 표가 두 장 생겼는데 같이….
여: 병원 가야 하는데….
남: 이제 3시밖에 안됐는데…. 병원 늦게까지 하잖아요.
여: 친구도 만나기로 했어요, 터미널에서. 친구가 5시 차를 타거든요.
남: 아니면 연락처라도 좀 주실래요? 그 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여: 진짜 가야 하는데….
남: 그러니까 지금 영화 보기 곤란하면 나중에 한번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락처 좀….
여: 가야 하는데…. 연락처 누구한테 잘 안 가르쳐 주거든요.
남: 아, 그래요? 아쉽네. 마음에 드는데….
■ 카운슬링
이 남성이 헌팅에 실패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옷차림이 문제다. 대부분의 한국 여성은 깔끔하면서도 멋스럽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을 좋아하는데 이 남성의 의상은 다소 튀는 느낌이다.
둘째, 여성을 처음 만났을 때 건넨 말(오프너)도 적절하지 않다. "저기요"와 같이 단순하게 말을 거는 표현보다는 정말 뭔가 급하고 궁금한 듯한 표정과 말투로 상대의 시선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길 묻기처럼 거부감을 주지 않는 무난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
셋째, 대개의 남자들은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쪽이 마음에 들어서" 등 다분히 작업 의도가 느껴지는 말을 건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헌팅 실패 요인 중 하나다. 화제를 이어갈 때는 "다름이 아니라" 등의 말로 주위를 환기시킨 후 상대의 옷차림이나 외모 중 마음에 드는 점을 언급하며 "스타일이 좋다" "센스 있다"라고 칭찬하는 것이 좋다.
/ 글·사진 = 임혜진 인턴기자·서강대 철학과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