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독들이 '진심'을 말하지만, 영화판에서 '진심'을 말하려면 먼저 '재능'을 증명해야 한다.

연쇄 살인 스릴러 '추격자'로 평단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신예 나홍진(34) 감독을 19일 만났다. 하루 밤낮으로 벌어지는 실시간 추격을 더할 나위 없는 긴박감으로 잡아낸 재능에 대한 칭찬이 대다수였는데, 정작 감독은 자신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백하는 데 더 무게중심을 뒀다. 오랜만에 재능있는 감독의 '진심'을 들었다.

"칭찬을 들으니까 처음 2~3일은 마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까 정리를 좀 하고 싶어졌어요. 제 영화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죠."

나홍진 감독(오른쪽)은“김윤석 선배가 연기하는 만큼만 연출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배우는 여덟 살 아래 감독을“어마어마한 집중력이 있는, 스나이퍼(저격수)같은 감독님”이라고 치켜세웠다.

많은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서 2004년 7월에 붙잡힌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떠올리지만, 감독 나홍진에게 '추격자'의 기원은 그 직전 6월에 있었던 김선일 피살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무장단체에게 인질로 납치되어 결국 살해당한 비운의 영혼. 그는 '밀실'이라는 단어를 썼다. 망자(亡者)가 '밀실' 안에서 겪었을 공포와 '밀실' 밖 일부 대중들의 차가운 반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그런데 저 자신도 똑같다는 걸 알았어요. 김선일 피살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일에 전념한답시고, 그 직후에 벌어진 유영철 사건을 그냥 하나의 텍스트로만 바라 본 거예요. 누군가가 살해되는 동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숨을 쉬었다는 죄책감. 한 술자리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표현을 써 가며 안주거리 삼아 떠들더라고요.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강한 적대감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추격자'에는 이 두 사건에 대한 감독의 반성적 시선과 희망이 배어 있다. 범인 수사에 무능력한 경찰 혹은 냉담한 시민들의 풍경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고, 백주에 납치당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밤새 살인마를 쫓는 김윤석의 캐릭터는 결국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구세주의 역설적 비유였던 셈이다. 그는 이 영화의 잔혹한 묘사를 일부 관객들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지적에 대해, "악취미가 아니라, 힘들게 보셨다면 제 뜻대로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사회적 사건에 대한 시선이나 생각이 달라진다면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진지했던 인터뷰 분위기는 '추격자'의 주연 김윤석이 들어서면서 유머를 더했다. 감독보다 여덟 살이 많은 그는 '신인감독 나홍진의 서포터'를 자처했다. "첫 촬영분을 보는 순간 무조건 감독의 편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감독이 연출 엔진을 가동하기 위해 내가 한 통의 '불스 원샷'(연료 첨가제)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이 민망하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자 "나 감독은 어마어마한 야전 스타일. 자기 완결성을 갖춘 외인부대 용병 같다. 신인 감독인데도 촬영 장비부터 배우의 심리, 1부터 100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며 감독 응원에 여념이 없다.

한양대 공예과 94학번인 나 감독은 대학에서는 엉뚱하게도 만화가를 꿈꾸는 학생이었고, 졸업 후에는 광고회사에서 아르바이트로 바닥부터 일을 하다 영상에 매료됐다고 했다. 결국 관심은 영화로 확장됐고, 2005년에 30대 초반의 나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했다. '추격자' 다음 계획은 일단 학교로 돌아가는 것. 그는 "영화 찍는답시고 아직 두 학기 밖에 다니지 못했다"고 겸연쩍어하면서 "세계와 삶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한 뒤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후반, '추격자'의 전날 흥행 성적이 문자메시지로 도착했다. 재능이 뒷받침된 그의 진심에 관객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 영화의 개봉 첫 주말 성적은 67만 명으로 할리우드 오락영화 '점퍼'에 이어 2위. 하지만 18일 월요일에는 하루 동안 10만 명으로 '점퍼'의 7만 명을 누르고 '추격자'가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추격자'의 흥행 추격은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