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살면서 1년에 2~3번 명절에나 오시던 칠순의 아버지가 밤 늦게 불쑥 경기도 일산 아들(44)의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한테선 기름냄새가 났고, 때마침 TV에서는 숭례문 화재 소식을 전하는 긴급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창경궁에 방화를 했다가 잡혀, 온 집안이 고생했던 2006년 일이 떠올랐다. 불안한 예감이 든 아들은 "남대문에 불이 났다는데 혹시 아버지가 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백발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했던 아들은 분노가 뒤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아버지, 다른 집안은 자식들 때문에 부모가 고생을 하는데, 어째서 우리 집은 아버지 때문에 자식들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는 겁니까."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종기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알려진 지난 10일 밤의 씁쓸한 실화다.
경찰이 채씨 아들 집을 찾은 것은 11일 오전. 경찰이 아버지를 찾자 아들은 "지난밤 연락도 없이 왔다가 새벽에 강화도 어머니 집에 갔다"고만 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듯했지만, 한시가 급했던 경찰은 강화도로 달려가 채씨를 체포했다.
처음 범행을 부인하던 채씨는 불이 나던 날 밤 행적을 묻는 질문에 당황하며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고,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사무실로 들어서자 범행을 자백했다. 이 자리에서 채씨는 아들에게 범행사실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찰은 바로 아들을 불러왔고, 칠순의 아버지와 불혹의 아들이 대질했다. 아들은 그제야 아버지와 나눈 전날 밤의 대화를 전부 털어놨다. 채씨의 범행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