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에 쓰는 물건인고….' 몸통은 고슴도치 형태, 하지만 등에 가시가 없다. 발가벗은 고슴도치라고나 할까. 자석으로 된 몸통이 각종 철물을 끌어들여 가시를 만든다. 클립을 붙이면 클립 홀더로, 바늘을 갖다 대면 바늘꽂이로. 주인장 맘대로 정체가 변한다.
세계적인 이탈리아 디자인업체 '알레씨(Alessi)'에서 '도지(Dozi)'라는 이름으로 지난 2004년부터 판매하고 있는 이 제품은 전 세계 50여개 국에서 10만 개가 넘게 팔린 초히트 상품. 디자인 소품 시장에선 1만 개만 팔려도 '대박'이라고 한다. 2004년 미국 '포천(Fortune)'지로부터 '올해의 베스트 상품'에도 선정됐고, MoMA(뉴욕현대미술관) 디자인숍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기발한 상품 '도지'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디자이너 김형정(36)씨. 한국인 최초로 알레씨와 일했지만, 국내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다. 김씨는 헝가리인 아내 샤로시 헨리에타(Henrietta·32)씨와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살며, '미카(Mika) 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용자와 제품, 주체와 객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디자인이 좋아요." 전화로 만난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사용자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열린 디자인'"이라고 정의했다. 전화기 너머 진중한 목소리는 그의 디자인에서 묻어나는 발랄한 감성과 사뭇 달랐다.
'도지'는 열린 디자인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 "공장에서 생산돼 판매될 때까지는 미완(未完)의 고슴도치 형상이에요. 소비자가 클립이나 바늘, 못 등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형태가 완성됩니다. 사용자가 자기만의 소통을 하도록 고안했어요." 작은 새 모양 이쑤시개꽂이 '비비 마마'는 화병, 티슈꽂이로 바뀐다. 태극 형태의 후추통 '듀얼'은 조합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김씨는 해외에서 성장한 교포 출신이 아니다. 2000년 대학원(서울대 디자인학부) 재학 시절 핀란드 '헬싱키 아트 디자인대(UIAH·University of Art and Design Helsinki)' 교환 학생 경험이 인생의 나침반을 돌려놨다.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보고 있으니 '서울대'라는 안락한 울타리에 기대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더군요." 그곳에서 섬유디자인을 전공한 아내도 만났다. '미카'라는 활동명은 그때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제 행동이 꼭 핀란드 시골 남자 같다며 제일 흔한 남자 이름 '미카'를 붙여줬어요. '핀란드의 철수'랄까요? 하하."
작품에 억지로 애국·애족을 반영할 의도는 없지만, 때론 한국이라는 뿌리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 놀란다고 했다. 생산비와 환경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합 가능한 형태의 후추통을 고안했는데, 나중에 보니 태극 형태였단다. 대표작 '도지'는 순우리말 '고슴도치'에서 따온 것. 어릴 적 통통해서 가족들이 '돼지'를 귀엽게 변형시켜 부르던 별명이기도 하다.
아직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은 없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저 정도 실력의 디자이너는 유럽에 깔려 있거든요." '10의 아웃풋(결과)을 위해 적어도 100의 인풋(투입)을 쏟는다'는 신조를 가진 김씨. 저 멀리 동유럽 작은 나라에서 그의 꿈이 여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