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가 조금 늦은 시간, 한 여자가 휴대전화의 폴더를 연다. 익숙한 손길로 남자 친구의 번호를 누른다. 몇 백 번도 넘게 들었을 통화 연결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뿐이다.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남자 친구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아니, 남자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동료, 혹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너무나 흥겹게. 왜 남자는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은 걸까. 연애 중인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상황이다. 진실은 간단명료하다. 무섭기 때문이다. 누가?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가.
여성들은 신경질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로 묻는다. "왜 남자들은 친구들과 술자리에만 가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죠?" 남자가 때로 졸렬한 겁쟁이며 대책 없는 낙관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지 모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오늘 저녁에 뭐할 거야?"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남자가 대답한다. "저, 대학 동창들과 약속이 있어." 실망한 여자가 마지못해 허락한다. "알았어. 너무 늦게 들어가진 마. 술도 많이 마시지 말고." 어려운 '윤허(允許)'를 받아낸 듯한 남자는 흔쾌히 대답한다. "그럼, 일찍 갈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나 언제나 상황이란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한 잔이 열 잔이 되고, 열 잔이 여러 번 돌다 보면 냉철한 이성 따윈 잠시 전원을 끄기 마련이다. 그 때 여자 친구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자는 혼란에 빠진다.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어섰고 여자 친구는 호박으로 변해버린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평상시의 온화함을 잃어버린 채 맹공을 가해 올 것이 뻔하다. "지금 몇 신 줄 알아? 내일 회사 출근 안 할 거야? 좋아, 딱 1시간 주겠어. 집에 들어가서 전화해!" 몇 번의 갈등 끝에 남자는 벗어 놓은 재킷 안으로 휴대전화를 깊숙이 밀어 넣는다.
'해결 방법이 없을 땐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손자가 일찍이 병법서에 기록하지 않았던가. 마음을 정한 남자는 이런 생각에 빠져든다. '지금 혼나나 내일 혼나나 어차피 혼나기는 매한가지. 그래, 매도 몰아서 한 번에 맞는 것이 덜 아플 것이다.' 휴대전화를 진동모드로 놓은 채 벗어 놓은 겉옷 깊숙이 두었다는 상황설명이나 배터리가 절묘한 타이밍에 다 됐다고 변명하는 수법은 '남성 처세술 교과서 1장'에 나와 있는 공식들이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핑계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수십 통도 넘는 여자 친구의 전화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아 든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상황에선 남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남자를 다루는 방법 중에 '동물의 왕국'에도 종종 등장하는 '고전'이 하나 있다. '무리를 지어 있을 때는 절대 싸움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하이에나 한 마리는 암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무리를 지어 있을 땐 경우가 다르다. 볼품 없는 몸체에 가시 같은 이빨 몇 개를 지닌 주제에 감히 용맹한 암사자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주변의 동료들이 공포를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싸움을 거는 순간, 순식간에 주변 친구들과 합세한 남자 친구는 17대 1로 여자 친구에게 덤벼들 가능성이 크다.
남자들의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또 다른 이유도 숨어 있다. 여자 친구의 전화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일 경우 동료 하이에나들이 집중 포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삼돌이 같은 자식, 여자 친구에게 벌써부터 잡혀 사냐." 이것은 자신의 무리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삼류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친구들과 있을 때 당신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된다. 남자란 존재는 친구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늦은 밤, 남자 친구가 누군가와 술자리를 갖고 있다면 냉정한 목소리를 담은 한 번의 전화로 상황을 끝내라. "내일 아침 전화해." 이 작전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침묵과 암시는 상상력을 자극해 공포를 유발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의 고단수 전략에 휘말린 남자는 스스로 통금을 설정하고 재발 방지에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불행히도 당신은 아직 그의 여자 친구일 뿐 아내는 아니지 않은가. 월권은 해를 부르는 법. 그가 당신의 품 안으로 온전히 들어올 때까지 '순간의 인내'를 발휘해야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