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문체 미학의 정수로 꼽히는 산문집 '자전거 여행'(2000)은 산문을 시(詩)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자전거를 탄다"는 단순한 메시지가 반복되지만, 다양한 비유와 수사로 변주된 문장은 언어의 미적 경지가 도달할 수 있는 경계를 탐험한다. 이시영 시인은 반대의 작업을 한다. 그는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에서 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겨 적은 뒤 "이것이 시"라고 선언함으로써 운율을 해체한 산문시의 한 극단을 실험했다. 최승호 시인은 동일한 글 재료를 갖고 산문과 시를 썼다. 그는 산문집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1993)에 수록한 글 가운데 73편을 시로 재가공해 시집 '반딧불 보호구역'(1995)에 실었다.
산문과 운문의 오랜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실험이 한국 문학의 전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권혁웅(41·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인은 최근 '두근두근'(랜덤하우스)이라는 작품집을 통해 이 흐름에 동참했다. 몸에 대한 짧은 단상을 담은 이 책의 글들은 시로 읽으면 시가 되고 산문으로 읽으면 산문이 된다. 하나의 글이 시와 산문으로 동시에 분류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글감으로 여러 장르의 글쓰기를 시도한 최승호 시인의 작업과도 차별된다.
'지쳐 잠든 남편 등에 아내가 곤한 얼굴을 기댄다. 둥글게 눈 녹은 자리가 생긴다.'('두근두근'에 수록된 '눈 녹은 자리' 전문), '글을 쓰는 나와 바라보는 나. 나는 내 자신의 꿈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미지이고 기억이다.'('나는 내 자신의 꿈이다' 전문)
권 시인은 "최근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보면, 시로 소설로 수필로도 딱 떨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모든 요소를 지닌 어떤 글쓰기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글들은 문체를 중시하고, 전체 줄거리보다 개별적인 글이 주는 이미지나, 특정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독자에게는 글을 처음부터 뒤로 순서에 따라 읽으라고 하지 않으며, 문학에 대한 접근자세에도 유연함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권 시인은 특히 이번 책에서 신체 각부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과 해당 부위에 대한 해부학적 설명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미지를 강조하는 글쓰기를 실험한다. 수록된 글 '손가락'편은 손가락을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손가락에는 손가락 뼈(指骨)가 있다. 지골은 기절골, 중절골, 말절골이라 불리는 세 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지만…'이라는 글을, '무심한 손가락이 잊혀진 사람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수가 있다. 천관녀의 집을 찾아간 것이 말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면 김유신은 손가락을 잘랐을까'(수록작 '김유신의 손가락' 전문)와 병치해 단지(斷指)의 감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권 시인은 2년 여 전, 난해한 시를 쓰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게 '미래파'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후 '문학계의 작명가'로 통해 왔다. 그는 문예 계간지 '문예중앙' 겨울호에서 이미 "장르를 나눌 수 없는 신종 장르가 등장했다"며 이를 '제4의 문학'이란 신조어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용어에 대해 "장르간 경계 허물기를 기존 장르에서 파생된 변종으로 취급하지 말고 주체성을 가진 독자적인 글쓰기 영역으로 받아들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