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간원(司諫院)은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양사(兩司) 또는 대간(臺諫)으로 불렸다. 보통 사헌부 관원은 대관(臺官), 사간원은 간관(諫官)으로 불렸다. 둘 다 백관에 대한 탄핵권이 있는 막강한 부서였으나 기능은 조금 달랐다. 사헌부는 언론 기능 외에 수사권까지 있었으나 사간원은 언론이 주된 기능이었다. 그래서인지 사헌부는 위계질서가 엄격했지만 사간원은 성현(成俔)이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존비(尊卑)의 예절이 없었다'라고 전할 만큼 상하 간에 허물이 없었다. 서거정(徐居正)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사간원은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라고 전할 만큼 음주를 일삼기도 했다.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문신 조운흘(趙云�)이 "한 잔 한 잔 또 한 잔/대사간이 술에 취해 봄바람 앞에 쓰러지네(一杯一杯復一杯/大諫醉倒春風前)"라고 대사간의 음주를 노래할 정도였다. 대관(臺官)은 흑의(黑衣) 입은 하인이 인도하고, 간관(諫官)은 홍의(紅衣) 입은 하인이 인도하는데, 금주령 때 홍의 입은 하인이 술 취한 채 흑의 입은 하인에게, "나는 날마다 취해서 얼굴이 붉기 때문에 옷도 붉지만, 너는 너의 대관(臺官)처럼 썰렁하게 술을 마시지 않아서 얼굴이 늘 검은 빛이기 때문에 옷도 검은 것이다"라고 조롱했을 정도로 사간원은 금주령도 아랑곳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간원이 존경받은 이유는 고위직은 물론 임금에게도 쓴 소리를 사양하지 않았던 강직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산군 재위 12년(1506) 폐지시켰는데, 중종반정 당일 다시 창설되었던 자랑스러운 기록도 갖고 있다. 또 하나는 백관 탄핵권이 있음에도 청한했기 때문이다. 사간원은 표피(豹皮) 한 장을 여러 아문에 돌아가면서 세를 주어 공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간원표피(司諫院豹皮)'라는 말이 생겼다고 '지봉유설'은 전하는데, 녹피(鹿皮)를 빌려주기도 했다. 심지어 사간원 뜰의 배나 대추를 각 관서에 팔아서 비용을 마련했다고도 전한다. 막강 권력의 사간원은 돈이 아니라 명예를 먹고 살았기 때문에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도 사간원 같은 부서 하나쯤 갖고 있으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