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 다섯 개로 만든 달랑 2초짜리 음악이 하루 1800만 번이나 울린다. 작년 말부터 SK텔레콤 가입자끼리 전화 걸 때 들리는 음악 "딴딴따단딴(솔미파라솔)"이다. 'T-링(ring)'으로 불리는 이 음악은 새해 들어 숫제 '새해 복 많이'란 가사를 붙인 광고가 나왔다.
(본지 1월 11일자 보도)
2008년, 대한민국은 광고 음악 전성시대다. 'T-링'처럼 음표 다섯 개로 만든 2초짜리 멜로디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대변하는가 하면, 잘 만든 CM송 하나가 제품 판매율을 상승시키기도 한다. 아주 짧은 시간, 최대한의 임팩트를 남겨야 하는 것이 광고 음악의 숙명. 기업들의 '송(song)마케팅'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소비자를 세뇌시켜라
"오늘은 왜 이리 잘 나가는 걸까. 좋은 기름 덕분일까"(에스오일), "달라, 달라, 달라 난 달라~ 내가 타는 차가 바로 그 차~"(아이써티), "보일락말락~"(아일락)….
우리 귀에 맴도는 이 CM송들은 중독성이 강하다. '쉽고 짧게, 그러나 기억에 남는' 음악이 CM송의 미덕. 소비자가 전파 매체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일종의 강제적인 음악이기 때문에 몇 초 동안 기업이나 상표의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정선우 제일기획 광고팀 국장은 "과거 CM송이 스토리 중심이었다면 요즘은 브랜드명과 핵심 메시지를 반복해 기억하기 쉽고 흥얼거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특징"이라며 "중독성, 세뇌 효과까지 노리는 것이 최근 트렌드"라고 말했다.
CM송의 인기는 곧바로 제품 판매율 상승, 기업 이미지 홍보 효과로 이어진다. 지난해 7월 첫선을 보인 현대자동차의 'i30(아이써티)'는 가수 빅마마가 부른 '달라송'이 화제를 모으면서 출시 한 달 만에 하반기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다.
현대자동차 국내광고팀 전원 대리는 "'달라, 달라, 난 달라'를 강조한 가사에 컨트리풍 멜로디를 세련되게 표현한 음악이 젊은 층에 어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PR 광고를 통해 반복적으로 로고송을 내보내면서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클래지콰이의 여성 보컬 호란이 부른 한화 '행복해 송'이 대표적. "그대 곁에 있어서 난 행복해~"로 시작되는 이 로고송이 인기를 끌자, 한화그룹은 홈페이지를 통해 '행복해 송' 휴대전화 벨소리 무료 다운로드 서비스를 개시, 열흘 만에 1만 건을 돌파했다.
◆숨은 실력자들
중독성 강한 광고 음악들은 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 광고 음악만 전문으로 만드는 음악감독은 20명 안팎. 대부분 음향 프로덕션에 소속돼 있어 '월급'을 받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몇 안 된다.
광고 음악 감독 1세대인 가수 김도향씨. 1970~80년대에 그가 발표한 CM송은 3000곡이 넘는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등 우리 귀에 맴도는 CM송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음향 프로덕션 '닥터 훅'의 김연정(32) 음악감독은 SK텔레콤의 'T-링'을 만든 주인공. KTF 광고의 "해브 어 굿~ 타임" 같은 징글(기업이나 제품을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든 짧은 소리나 음악)뿐 아니라 LG전자 '엑스켄버스하다' 시리즈,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시리즈 등 '히트작'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광고 콘티가 결정된 후부터 방송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30일. '푸르지오' 징글을 만든 고여송(39) 음악감독은 "징글은 단 2~3초, 풀송(full song)이라 해도 길어야 30초에 불과하지만, 밤을 새워가며 수십 개의 버전을 만들고 수차례의 회의와 수정 작업을 통해 최종 작품이 선정된다"고 했다.
키스에프엠의 김용휘(39) 오디오 프로듀서는 "기존에 발표된 곡을 선곡해서 쓸 때 가장 큰 문제는 저작권"이라며 "비틀스의 곡은 석 달 쓰는 데 4만5000달러, 비틀스의 실제 목소리를 써도 안 되고 비슷한 모창도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고 말했다.
◆광고 음악과 돈
이들이 광고 음악 한 편을 작곡하는 데 받는 돈은 대략 500만~1000만원. 가수나 연주자들에게 지급되는 돈, 녹음비 등 제작 비용을 포함한 액수다. 익명을 요구한 A감독은 이 가격이 "15년 전 동결된 수준"이라고 했다. 1990년대 초 광고 음악 제작업체들과 광고대행사 관리팀이 모여 '편당 450만원'이라고 적정선을 정한 후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물가, 인건비, 장비 비용까지 크게 올랐는데 광고 음악 시장 가격은 변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했다. B감독은 "최종 녹음까지 끝내도 광고주가 "노(No)"라고 하면 다시 작업해야 하지만, 수정 녹음을 10번 하든 20번 하든 '추가 수입'도 없다"고 했다.
광고 음악이 인기를 끌면, 만든 사람들도 떼돈을 벌까. 당연히 "그렇다"일 것 같지만,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천만에"라고 했다. 벨소리 다운로드, 휴대전화 컬러링 서비스, 홈페이지 배경음악 등 콘텐츠는 다양화됐지만, 2차, 3차 유통 과정에서 원작자인 이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거의 없다.
일단은 저작권 문제. C감독은 "광고 음악의 경우 저작권은 일단 광고주가 갖는다는 인식이 묵시적으로 형성돼 있다"고 했다. 그는 "유명 뮤지션이 작곡할 경우, 작곡자가 먼저 저작권을 요구하면 들어주기도 하지만, 아직 주먹구구식이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시장도 문제다. 김시환(44) '악프로덕션' 대표는 "내가 만든 곡들이 컬러링이나 각종 홈페이지를 통해 무단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막을 방도를 찾고 있다"고 했다. 김도향씨는 "저작권은 원래 원작자가 갖게 돼있는 건데 내가 안 찾았더니 아무 데서나 막 가져다 쓰더라"며 "보다못해 작년에 저작권협회에 스크류바 등 5곡을 등록했다"고 했다.
최근 가수 박진영씨가 "내가 만든 KBS 로고송 저작권료로 '텔미'보다 더 많이 벌었다"고 말해 화제가 됐지만, 업계에선 "그야말로 '박진영'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반응이다. D감독은 "몇 년 전에 지인이 타 방송사의 로고송을 만들었는데 계약할 때 저작권료를 포함, 1500만~2000만원 선금을 받고 끝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