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의 북한’이라고 일컬어지는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은 지난해 12월 21일 ‘종신 대통령’이었던 투르크멘바시(Turkmenbashi·투르크멘의 지도자 혹은 아버지) 사망 1주기를 맞았다. 본명이 ‘사파르무랏 니야조프’인 투르크멘바시는 1991년 구 소련 붕괴 직후 정권을 잡은 뒤 15년간 철권 통치를 했고 개인 우상화 정책을 펴온 인물로 유명하다. 자신의 모습을 빚은 동상에 금칠을 하고, 초상화를 전국 각지에 설치했으며, 자신의 철학을 담은 저서 ‘루흐나마(Ruhnama)’를 청소년들에게 강제로 읽혔다.
처음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했던 때는 2006년이었다. ‘투르크멘바시(투르크멘의 지도자)’인 사파르무랏 니야조프의 금칠한 동상과 초상화가 도시와 시골 방방곡곡에 걸려있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루흐나마’를 외우고 니야조프 찬양가를 불렀다.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절대 권력을 잃은 나라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지난해 12월 초,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12월 21일은 이 나라를 15년간 통치했던 투르크멘바시가 사망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이슬람교도들의 축제일인 ‘이드 알 아드하’가 끼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싸늘한 느낌이었다.
이전에 왔을 때처럼 도시 곳곳엔 니야조프가 생전에 지은 수십 개의 금동상이 있었다. 니야조프는 1991년 구 소련 붕괴 직후 98.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종신 대통령으로 헌법을 고쳐 사망 직전까지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배해왔다. 그는 자신의 금동상을 대로변과 관공서에 설치했을 뿐 아니라 가족도 신격화했다. 지진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동상과 초상화를 거리에 설치하고, 달력의 1월과 4월을 자신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카스피해 연안의 한 도시 이름도 '투르크멘바시'로 바꿨다.
아슈하바트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내 관광을 나섰다. 가이드는 차를 몰고 시내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니야조프의 금동상이 있던 자리는 변함이 없었다. 재작년처럼 어떤 동상 앞엔 두 명의 군인이 24시간 지키고 서 있었다. 니야조프의 금동상이 태양의 방향에 따라 회전하는 '영세 중립국 기념탑'도 그대로 시내 중심가에 우뚝 서 있었다.
대신 관공서엔 니야조프의 초상화가 새 대통령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y Berdimuhammedov)’의 대형 초상화로 교체된 곳도 있었다. 지방이나 투르크멘바시 같은 도시엔 니야조프의 초상화가 걸린 곳이 많았지만, 수도인 아슈하바트만큼은 새 대통령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동상은 그대로 놔둔 채 초상화만 바꾼 모습. 점진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니야조프의 죽음 - 갑자기 막 내린 15년 1인 치하
지금은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지난해 이맘때쯤 니야조프가 사망했을 때 투르크멘인들은 적잖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한 투르크멘인이 그때 상황을 조심스레 전해줬다.
투르크멘 정부가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을 때,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세상에나…니야, 니야조프가!”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신이나 다름없던 존재가 죽으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이슬람 축제기간인 ‘이드’ 기간이었다. 하지만 투르크멘인들은 축제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경찰들이 각 지역에 추가 배치되고, 투르크멘인들은 음주가무를 즐길 수 없었다. 금주령이 내려져 보드카를 마시는 주민들을 단속했다고 한다. 니야조프의 장례식은 12월 24일까지 대통령궁에서 행해졌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그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놓은 가족 묘에 안치됐다. 아슈하바트에서 10㎞ 떨어진 ‘킵첵’이라는 마을에 세워진 그의 대리석 묘지는 군인 3명이 24시간 그 입구를 지키고 있다.
15년간 지배한 독재자가 사망한 뒤 차기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두 달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엔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우선 전체 인구 수가 서울 인구의 절반 정도 수준인 500만명이란 점을 꼽는다.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나라의 교육 정책도 한몫을 한다. 청소년은 만 16세 내지 17세가 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뿐만 아니라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는 소년들은 모두 2년간 징집대상이 된다. 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군대 및 의무경찰로 전국 각지에 배치돼 주민을 통제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데 활용된다. 니야조프는 “투르크멘인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며 지방 도서관 문을 닫게 하는 등 우민화 정책을 폈다.
니야조프는 개인 우상화 정책의 일환으로 자신이 지은 ‘영혼의 책’이라 불리는 ‘루흐나마’를 각 학교에 배치했다. 2001년부터 대학 진학을 위해선 루흐나마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투르크멘 정부는 니야조프 사망 직후, 모든 서방 기자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문호를 폐쇄했다. 정권 이양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 후 투르크메니스탄에선 작은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점진적 개방 - 중국과 교류 활성화 등 바깥 세상으로
새 대통령인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취임하자마자 아슈하바트 시내에 PC 방을 서너 군데 추가로 설치했다. 투르크멘인들에게 바깥 세상과의 접촉은 극소수의 해외 교환 학생이나 보따리 장수들을 제외하고는 케이블 TV가 전부였다. 그런 그들이 인터넷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인터넷 사용률은 전체 인구의 0.7%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휴대폰이 상용화되고 있으나 시골에선 집전화도 없이 전통적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또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초중등교육 기간을 9년에서 10년으로 연장했다. 니야조프 시절에 있었던 통금도 완화시켰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방문, 자신이 신실한 이슬람교도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켰으며, 니야조프 사망 1주기에는 이슬람 축제일인 ‘이드’를 즐길 것을 권장했다. 국민들은 무조건 니야조프를 찬양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이렇게 그전과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서 사망 1주기를 맞은 것이다.
새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중국과의 새 무역협정을 통해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으며, 카스피해 부근 ‘아와자’라는 도시에 두바이를 본뜬 ‘자유여행 특별지구’를 만들어 리조트를 건설 중이다. 머지않아 이곳은 무비자 방문지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폐쇄적인 투르크메니스탄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니야조프는 재위 시 특이한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이를테면 비디오게임이나 TV 방송 아나운서의 화장을 금지한다든가 또는 립싱크를 금지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번에 보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비록 제한된 지역에서였지만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들은 화장을 하고 TV에 출연했고 가수들은 방송에서 립싱크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니야조프 재임 당시인 2006년 1월 전국 연금 수혜자 3분의 1의 연금이 중단됐으나 새 대통령은 이들 중 10만명의 연금을 복원했다.
변화의 물결은 곳곳에서 확인됐다. 2006년 방문 땐 검문소가 고속도로에 1㎞마다 한 곳씩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곤 통행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외국인 관광객들은 “예전보다 검문검색이 훨씬 완화됐다”고 입을 모았다.
제한된 자유 - 검열·언론 통제 여전, 정치 얘기 못 꺼내
이런 점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민들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니야조프의 가족묘를 방문한 투르크멘인들은 여전히 니야조프와 새 대통령의 은덕을 찬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 사용자들은 아직도 정부가 자신들의 메시지를 검열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공공 장소라 하더라도 니야조프의 동상 중 상당수는 아직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으며, 자유로운 의견교환은 불가능하다. 언제 어디서 국가정보원이 도청을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이드에 따르면 서방 관광객이 촬영한 가게 점원의 사업 면허증이 취소되는 등 불이익이 가해진 적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운영하는 각 일간지의 1면은 아직도 대통령의 얼굴이 장식하고 있으며, 북한의 ‘로동신문’처럼 지도자의 얼굴이 접히지 않도록 왼쪽 상단에 그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배치한 모습이 눈에 띈다.
2년 전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국토가 니야조프의 초상과 동상으로 꾸며져 있었다는 데에 놀랐고, ‘중앙아시아의 북한’이라고 여겼지만 북한과 달리 주민들과의 직접 접촉이 가능하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지금도 정치적인 얘기를 입 밖에 못 꺼내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일이 이번에 벌어졌다. 겉으로 보이는 개방적인 모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열심히 대통령 동상과 초상 사진을 찍었었다. 그러나 가이드로서는 이 모든 것이 위험한 행동이었다. 가이드의 상관은 나에게 “쓸데없는 행동을 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카메라를 압수하겠다”고 말했다. 3년 전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당시 북측 안내원이 “북한 주민들을 촬영했다”는 걸 상부에 고발해 우리 측 여행사 직원이 나에게 경고를 줬었다. 새삼스레 북한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투르크메니스탄에도 정치적인 위기가 한 차례 있었다. 2002년 11월에는 니야조프의 차량 행렬을 향한 총격 사건이, 즉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고 정적으로 의심이 가는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의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니야조프는 더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번 방문에서 “이전 지도자에 대한 불만은 없었는지” “그런 걸 드러낸 사람은 없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자체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현지인들은 모두 “투르크멘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만 말했다. 투르크멘인들은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군의 침략을 받아 한 마을에서만 3000명의 양민이 학살된 경험이 있다. 서방 군대의 막강한 군사력을 깨달은 투르크멘인들은 구 소련의 중앙아시아 진출 당시, 약간의 유목민이 반발했을 뿐 두말 않고 투항했다고 한다.
투르크멘인은 통제된 사회에 살고 있을지언정 나름대로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니야조프의 지도력으로 독립국가가 유지되며,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니야조프가 세상을 뜬 지 1년이 지났건만 그의 15년 통치가 남긴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새 대통령이 점진적 개방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새 대통령의 영향력이 니야조프 시절처럼 팽창할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한 주민의 말대로 “언제 동상이 새 대통령 것으로 교체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식 독재와의 비교
같은 점 - 곳곳에 초상화, 결혼하면 동상 앞 기념촬영
다른 점 - 엄청난 석유·가스 자원이 독재 유지의 힘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은 여러모로 닮았다. 북한에선 정부에서 무료로 주민들을 평양으로 이동시켜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게 한다. 결혼식을 올리면 평양 만수대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하면 중립국 기념탑이나 독립공원에 있는 금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독재자의 초상화를 곳곳에 걸어놓은 것도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북한에선 가정에서도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걸어놓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정에는 대통령의 초상화를 걸지 않는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선 상점과 음식점 대부분에 니야조프와 베르디무하메도프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초상화가 걸리지 않은 곳엔 국기를 게양해 놓았다. 하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이 아무리 일당 체제로 독재 정치를 행사했다 하더라도 북한과 달리 서방 세계의 간섭을 덜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막대한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다.
이 나라는 러시아, 미국,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많이 생산한다. 천연가스의 추정 매장량은 10조㎥인데 전세계 매장량의 10%를 차지한다. 석유는 확인된 매장량이 21만3000t으로 추산된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 러시아, 카자흐스탄을 잇는 가스 송유관 계약을 체결했으며 중국과는 30억㎥의 가스를 공급하기로 결정하는 등 지하자원을 무기로 경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곳에선 ‘기름이 물보다 싸다’고들 한다. 실제 시장에 가서 조사를 해보니 기름은 1ℓ에 2센트(약 19원)인 반면 물은 1ℓ에 20센트(약 190원) 정도였다.
풍부한 석유와 가스는 그간 국민들을 통치하는 힘으로 작용해 왔다. 니야조프는 재임 시 사비(私費)로 보잉기를 구입해 국내선과 국제선에 활용했다. 국내선 요금은 외국인의 경우 편도 30달러 수준이지만 내국인은 1달러50센트 안팎으로, 우리 돈으로 겨우 1000원 남짓하는 돈이다. 니야조프는 대통령이 된 뒤 주민들에게 수도, 가스, 전기를 무료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공교육은 모두 무료이며 대부분의 의료비도 무료이다.
주요 국가 행사가 열릴 때면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점심 잔치를 열어왔다.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니야조프 사망 1주기 때에도 각 지역 대표 5000여명을 초청해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의 교통비도 물론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