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제공

때가 꼬질꼬질한 하늘색 담요는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고, 축축한 팬티는 3개의 2층 침대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항문 질환 진료의 실제’ 등 각종 의학서적이 빽빽한 책상, 그 옆에 붙어있는 표어. “선생님이 담배를 끊지 않으면 환자들이 선생님을 끊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에 위치한 의학 드라마 ‘뉴하트’의 세트장 속 흉부외과 레지던트 숙소. 가상 공간이지만 의사들의 피곤한 일상이 덕지덕지 스며 있다. “사실 의사들에게는 냉철한 판단력이 중요하잖아요. 하지만 전 말과 표정만으로도 환자에게 용기를 주는 뜨거운 의사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이 공간의 ‘주인’인 레지던트 은성 역의 지성(본명 곽태근·31)이 웃으며 나타났다. 3회 만에 시청률 20%를 넘기며, 기분 좋은 출발을 한 ‘뉴하트’의 주역. 강직한 카리스마로 후배들을 압도하는 과장 최강국(조재현), 당차고 오만한 여의사 남혜석(김민정), 정치적 야심과 열등감으로 뒤틀린 민영규(정호근) 등 의학 드라마의 전형적 캐릭터들이 곳곳에 출몰하는 이 드라마에서 은성의 존재는 유쾌한 ‘반어’. 2007년 히트작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통해 이미 의학 드라마의 관습을 꿰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덜렁대는 사고뭉치 주인공 은성은 신선했다. 다른 의학 드라마였다면 ‘감초’ 역할쯤으로 충분했을 인물. 더구나 늘 심각한 표정의 ‘모범생’으로 등장했던 지성의 파격 변신에 시청자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능청스러운 모습, 그래서 더 남자다워요.”

군 제대 후 첫 작품에서 유쾌한 ‘신고식’을 치른 그는 “3년 만의 드라마인데, TV 화면에 제 얼굴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면서도 “처음에는 너무 ‘오버’해서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고 했다.

“원래 은성이처럼 까불거리는 성격은 아니에요.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놈인데…. 말도 많지 않구요. 그래도 제 안에 다른 모습이 많더라구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뉴하트’ 속 그의 별명은 ‘꼴통은성’ 또는 ‘꼴통지성’이다.

그는 “군 입대 전까지 주로 진중한 인물로 연기를 하면서 마음이 답답한 적이 많았다”고 했다. 시청률 50%를 넘어섰던 ‘대박’ 드라마 ‘올인’이 그에게는 가장 아쉬웠다. “매 장면 부족한 게 많았고, 인간적인 솔직함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제 마음을 더 열었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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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의 연기는 어떨까? “수술장에 들어가 심장수술을 받는 환자를 지켜봤어요. 30㎝ 앞에서 심장 뛰는 모습도 봤는데, 처음에는 겁이 덜컥 났었죠. 하지만 지금은 이 환자들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하는 안쓰러움이 앞서요.”

2일 방송에서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를 살리지 못해 절규하던 은성의 모습에 많은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이 드라마 촬영 초기에 어려서부터 같이 살았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많이 놀라고 힘들었다”며 “이 장면을 찍으면서 그때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고 했다. “저 군대 가 있는 사이, ‘올인’ 재방송 보는 낙으로 사신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새 드라마는 외할머니가 제일 먼저 봐주셨으면 했었어요.”

강원도 인제 전방부대와 국방 홍보원에서 2년간 군생활을 한 그는 “충분히 쉬다 온 셈”이라고 했다. “규칙적으로 잠자고, 운동도 시켜 주잖아요. 또 저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삶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군대에서는 즐겁게 살아남는 게 최고의 미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