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도쿄특파원

일본에는 이름은 자주 등장하는데 뭐하는 자리인지 불분명한 두 개의 권력이 있다. 하나는 ‘경제재정자문회의’란 정부 조직이고, 또 하나는 ‘특명담당대신(大臣)’이란 자리다. 둘 다 총리를 모시는 내각부에 설치돼 있다. ‘대처의 영국’처럼 일본사에서 ‘우파(右派)의 개혁 시대’로 기록될 고이즈미 집권기(2001~2006년)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자리다.

조직은 생소해도 사람을 떠올리면 권력의 강도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경제재정자문회의’를 이끌고 간 인물은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당시 한국의 전경련 회장과 비슷한 니혼게이단렌(日本經團連) 회장이었다. 일본 최대 기업 도요타자동차 회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이 경제계의 거물은 민간의원 4명 중 1명의 자격으로 들어갔으나 고이즈미 총리(자문회의 의장)를 대신해 자문회의의 방향을 주도했다. 스스로 낸 개혁 아이디어가 194건에 달했다.

‘특명담당대신’을 대표한 인물은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정치권이나 관료세계와 거리를 두고 개혁 이론으로 중무장한 미국파 학자 출신이다. 다케나카가 담당한 ‘특명’ 분야는 ‘경제재정정책’과 ‘금융’이었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장기간 이 자리를 차고 앉아 일본 정부의 개혁을 이끌어 갔다. ‘관료가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서 둘 다 이례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민간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쿠다와 다케나카가 일본에 남긴 개혁 정책은 다음과 같다. 노동·수도권 규제 개혁, 세출·세입 일원화 개혁, 공공사업 삭감, 정책금융 통폐합, 우정공사 민영화, 공무원 개혁, 공적자금 투입에 의한 금융권 부실채권 정리, 마지막엔 공영방송 NHK 개혁까지 일본 사회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린 과감한 개혁이 거의 여기서 나왔다. 철저한 기업지향, 성장지향적 정책들이었다. 격차 문제와 지방 소외 문제를 야기했다는 비판은 있으나 2000년대 중반 일본 경제의 부활이 이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성립됐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권력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경제재정자문회의’의 법적 권한은 경제정책, 재정운용, 예산편성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특명담당대신’은 한국의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합친 것과 같은 ‘금융청’이라는 정부 조직을 관할하고 있다. 이들의 법적 권한을 살펴보면 ‘무소불위’라고 하던 옛 대장성 해체 후 그 권력을 그대로 이양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정부조직 개편 때 해체된 것이 대장성이고, 생겨난 것이 경제재정자문회의와 특명담당대신이었다는 것은 일본의 경제 권력이 이동한 경로를 잘 보여준다. 관료의 품에 있을 땐 ‘현실 안주’에 사용되던 막강 권력이 민간으로 이동하자 ‘개혁 동력’으로 변한 것이다.

일본 대장성 해체의 의미는 권력이 관(官)에서 민(民)으로 이동했을 때 나라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있을지 모른다. 물론 방향이 옳지 않으면 민간으로 이동한 권력은 ‘아마추어리즘’으로 전락해 국가의 진로를 비틀어 버리는 것을 우리 스스로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국민이 선택한 길은 2001년 일본의 선택처럼 나라를 재도약으로 이끌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이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재경부 종무식 때 “재경부는 영원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니 틀렸다는 것이다. 개혁을 일단락한 뒤 오쿠다는 초야(草野)로, 다케나카는 대학으로 돌아갔다. 민력(民力)에 의한 개혁은 바로 “영원한 권력”을 지향하는 관료의 속성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