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

-한강론



1. 재현된 다프네 ─ 환상이 사라진 '식물-되기'



베르니니의 조각상 를 보면 급박한 찰나의 순간이 살아있다. 아폴론을 피해 숨가쁘게 달려가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서서히 월계수로 변해가는 다프네.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나뭇잎들이 솟아나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나뭇가지로 변하고, 다리는 어느 새 땅에 뿌리를 내려 굳건하게 엉겨 붙는다. 이제 식물로 변한 그녀의 몸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침범 당하지 않을 것이다. 물어뜯고 씹고 삼키는 폭력적인 동물성의 세계에 저항하는 식물성. 한강의 최근작인 장편「채식주의자」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처절한 고통과 저항을 내포한 식물성이다.

1997년 단편 「내 여자의 열매」로 ‘식물-되기’라는 새롭고 독특한 환상을 보여주었던 한강은 정확히 10년 만에 이 소설에 대한 변주로 볼 수 있는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같은 부모 아래 자랐지만 판이하게 다른 아이들과 같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소설 속 변신 모티프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한강의 소설에서 ‘식물-되기’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언급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동물-되기’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 불가능성’으로부터 기원한 절망이 ‘식물-되기’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 여자의 열매」와「채식주의자」는 유사한 지점에 놓여있다. 그러나 관계의 폭력성에 맞서 차라리 식물이 되고자 하는 한 여자의 불가능한 꿈-욕망-의 실현 여부에서 두 소설은 갈라져 다른 길을 간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온 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멍이 들었던 여자의 몸은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로 완벽하게 변신했지만, 「채식주의자」에서 나무가 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고 물구나무를 서는 등 능동적 행위를 수반하는 여자의 몸은 여전히 무언가를 소화하고 배설해야만 하는 동물의 육체로 남아있다. 그리고 전작 「내 여자의 열매」의 여자가 집 베란다에서 식물로 변한 후 남편에 의해 화분으로 옮겨지고 보살핌 받으며 사적이고 은밀한 생을 기록해나갔다면, 최근작 「채식주의자」의 여자는 정상과 비정상을 철저히 가르고 재단하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 정신 이상으로 분리되어 결국에는 정신 병원이라는 공적인 공간 안에 놓이며, 의학 담론에 의해 함부로 취급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강의 소설 속에서 그녀들의 역사(Her histories)는 처절한 아픔과 슬픔을 담은 동일한 기반 위에 놓여 줄기차게 식물이 되어 꽃을 피워내고자 열망하는 모습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변화했다. 바야흐로 그녀의 소설은 이제 비과학적인 욕망의 실현(‘식물-되기’)을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던 신화적 ‘환상성’을 버리고, 끈질긴 욕망이 현실적인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좌절되는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냄으로써 현실의 틈새를 파고 들어가 그 이면을 살피는 또 다른 ‘리얼리즘’을 실현해 보이고자 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나 ‘타인은 지옥’이다. ‘식물-되기’가 성공으로 귀결될 때, 이 변신은 타인을 둘러싼 현실을 가볍게 초월해버린다. 그러나 타인과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를, ‘식물-되기’를 절절히 갈망함에도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의 지점을 그리는 소설에서 독자들은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채식주의자」는 개인의 욕망이 현실과 대립되고 좌절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바로 여기에 같은 변주로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 한강 소설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가 한강에게 있어서 다프네는 21세기 한국에서계속해서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여성은 세상의 폭력성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신시키거나 파괴할 수밖에 없으며, 꽃 피고 열매 맺는 식물이 되고자 갈망한다. 그러나 끝끝내 남아있는 인간의 육체, 그 동물성은 환상으로 현실을 탈주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는 절망적인 몸으로 남는다.

2. 동물성과 식물성의 그로테스크한 공존-언어를 박탈당한 여성 육체의 ‘식물-되기’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속의 세 소설들은 시간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순서를 따라 서사를 펼쳐 놓으면, 남편에게 ‘특별한 매력도 특별한 단점도 없는 무난한’ 여자로서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주인공이 왜 육식을 거부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후 자신과 언니의 가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사회와 격리되어 정신병원에 갇히는지 그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이 가파른 비극의 곡선을 가진 플롯이 독자들에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전달되는 이유는 세 소설 모두 대문자 I가 중심에 놓여있기를 거부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기 때문이다. 연작 중 첫 번째 단편 「채식주의자」에서는 남편이, 두 번째 단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세 번째 단편 「나무 불꽃」에서는 언니가 각각 화자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여 주인공을 재단한다. 단순히 화자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제3의 인물들이 화자로서 개입하는 가운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여자가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멀어져 정신을 놓아버리기 때문에, 대문자 I ─ 모든 인식과 행동의 주체인 ‘나’ ─ 는 차츰 소멸된다. 소설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시점부터가 여성 주인공이 언표를 장악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비극성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처음부터 언표를 박탈당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연작소설 중 첫 번째 단편 「채식주의자」에서는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지도 권태로워하지도 않으며 다만 집에서 평범한 아내 역할을 해주는 것에 만족하고 있던 남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남편은 자신의 일상생활이 아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때에만 신경질적으로 여자에게 응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최소한의 단순한 대화를 제외하고는 남편에게 침묵으로 응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자에게는 그녀가 발화하는 n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은 소설의 사이사이에 이탤릭체로 쓰인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꿈에 대한 ‘독백’이나 무감정한 시선이 드러나는 ‘중얼거림’을, 때로는 숨에 가쁜 절규를 보여준다.

이제는 오 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도 할 수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채식주의자」, 43쪽)

새롭게 구성된 장을 통해 독자에게 드러나는 여주인공의 언어는 독특하고 강렬하다. 정돈되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때때로 광기 어린 넋두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중심’으로 상징되는 권위나 이성을 부정하는 ‘주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독백이 합리적 이성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유보적이고 부정적(否定的)인 망설임의 언어이자, 오랫동안 하위에 머물러오면서 키워진 여성만의 언어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그녀가 하는 말 중 많은 부분이 꿈에 관련된 내적 독백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은 의미 있게 드러난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에 연이어지는 연작 단편들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는 그 동안 작가가 이탤릭체를 통해 숨통처럼 틔워주던 그녀 내면의 발화까지도 침묵으로 변화하며 완전히 단절된 모습을 보여준다.

“처제, 나야. 듣고 있어? 지우엄마가... ”

스스로를 경멸하며, 자신의 위선과 책략을 소름끼치게 실감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하도 걱정을 해서 말이지.”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수화기 저편을 향해 그는 짧은 숨을 뱉었다. (「몽고반점」, 84쪽)

그녀의 변화와 함께 무겁게 동반되는 침묵은 여자의 언어 자체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억압 상황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언어들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고 감금된 여자를 드러낸다.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 당하고 언어마저 빼앗겨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는 여자는 서서히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식물이 되기 위해 여자는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능동적 행위들을 한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몽고반점」에서는 온몸을 꽃을 피우는 식물 그림으로 채우고 성행위를 하며, 「나무 불꽃」에서는 물구나무를 선다. 이 과정이 모두 몸이라는 외피를 통해 구현되는 모습은 그 동안 여성을 ‘육체적인 존재’로서 이야기해왔던 이론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A. R. 존스는 여성은 성기의 두 음순으로부터 나오는 확산된 성욕과 리비도적 에너지의 다중성을 경험하고, 이런 체험된 몸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고 했다. 한강의 소설에서 여자는 육체를 식물화시킴으로써 세계와 만난다. 그리고 이 식물은 본래의 수동적인 속성을 벗어나, 동물성이 결합되어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인다. 꿈틀거리는 성욕과 육식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그녀의 식물은 잔인하면서도 예민한 식충(食蟲)식물을 연상케 한다. 그 식충 식물이 뿜어내는 끈적하고 강렬한 힘은 독자들을 압도하는 동시에 매력적으로 소설 속으로 포획해낸다.

「채식주의자」에서 고깃덩어리와 칼질, 살인, 짐승, 피, 이빨, 손톱, 손, 발, 시선 등의 폭력적 이미지들과 대립된 지점에 놓여있는 유일한 육체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젖가슴’이다. 날카롭고 폭력적인 세계가 기존의 남성 질서(팔루스)의 권력행사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둥근 가슴은 모성의 질서를 상징하며 이에 맞선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채식주의자」, 43쪽)

가슴은 그 둥근 모양으로도 앞에서 열거한 날카로운 이미지들과 대립되지만, 아기에게 제공할 모유로 대표되는 모성성을 담고 있는 육체 내부의 생산적인 젠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가슴에 브래지어를 차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왔던 여자는 자살 시도 이후 대낮에 병원 뜰에서 상체를 햇볕에 고스란히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이는 마치 광합성을 하는 식물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벌거벗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던 태초의 공간에서의 이브를 연상케 한다. 어떤 욕망이나 죄악이 통과해본 적 없는 듯한 극도의 순수함. 하지만 이렇게 상체를 햇볕에 드러내놓고 있는 여자의 입술에는 피가 묻어있고, 꽉 쥐여진 손에는 살해당한 작은 동박새가 놓여있다. 여자의 온순한 식물성 이면에 살육하는 맹수와 같은 짙은 육식성이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다.

식물이 되어가는 여자의 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강렬한 동물성은 「몽고반점」에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말이 거의 사라진 채 표정과 고개를 움직이는 간단한 몸동작으로만 자신의 감정을 수동적으로 표출하는 여자는 몸 전체에 물감으로 낮의 꽃과 밤의 꽃을 휘감게 되면서 시각적으로는 한층 더 식물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런 식물적인 몸 위에 성교라는 동물적 욕망의 행위가 결합됨으로써 그녀의 식물성은 무화된다. 식물의 수분은 동물과 다르게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리를 유지한 채로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제3의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식물의 수분은 수동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 성행위 장면에서 남성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이 되어 그녀의 엉덩이 위에 놓인 몽고반점을 열고 덮으며 몸 속을 드나든다. 서로를 얽어 맨 채 하나가 되는 장면의 적나라한 노출은 수분하는 식물들의 수동적 이미지와 충돌하면서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나무 불꽃」에서 ‘물구나무 서기’는 나무들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여자에게 있어 중력을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자, 동물적 본능과 가까워지는 행위이다.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나무불꽃」, 179쪽)

인간의 신체는 본래 ‘관념’을 의미하는 머리가 가장 위쪽에, ‘본능’을 의미하는 배(성기 기관)가 아래쪽에 놓여 있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으로도 ‘cogito’를 외치며 등장한 근대가 정신/몸, 남성/여성, 문명/자연 등의 이분법적인 선을 그으면서, 몸과 여성과 자연은 항상 음습한 그늘, 즉 하위에 놓여져 왔다. 한강은 소설 속 여자의 물구나무 서기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전복시킨다. 본능을 관념보다, 몸을 정신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본능과 몸을 되찾는 것은 동물적인 생으로 보다 가까이 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여자의 물구나무 서기는 표면적으로는 식물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지만 더 강한 동물성을 표출하고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의 언니가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처럼 보고 있는 것은 여자가 변화한 동물과 닮아있는 사나운 식물성의 일면을 작가가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3.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격렬한 충돌 ─ 죽음을 향해 가는 ‘식물-되기’

프로이트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즉각적으로 피하려는 ‘쾌락 원칙’을 정신의 1차 과정이며 모든 생명체의 절대 원칙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쾌락원칙은 때때로 냉혹한 현실이나 초자아의 윤리적 억압과 맞부딪친다. 이때 보다 안정적인 쾌락을 확보하기 위해 즉각적인 쾌락 추구를 ‘지연’시키거나 욕망 대상의 현재 상태를 배려하는 ‘우회적인 욕망 충족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실 원칙’이다. 사람들의 사회 활동 가운데 많은 부분은 쾌락원칙을 대체하는 현실원칙을 쫓아 이루어진다.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나는 여자의 남편이나 「나무 불꽃」에서 보이는 여자의 언니는 사회적 윤리기준에 따라 자신의 충동을 적절하게 억제할 줄 안다는 점에서 모두 현실원칙을 따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때때로 인간에겐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실원칙을 넘어서 쾌락을 추구하는 현상들이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몽고반점」에서의 여자의 형부다. 그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윤리에 밝았고, 자신 대신 일상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내에게 충분히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처제와 성관계를 맺었을 경우, 그 동안 이뤄왔던 예술가로서의 모든 활동이 한 순간에 매장될 것이라는 점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욕망이 솟구쳐 올라 몰래 수음을 하면서도 그토록 오래 망설이고, 화려한 꽃을 프린팅을 하고 처제와 성행위 장면을 찍을 때 자기 대신 후배 예술가 J를 끌어들이는 등 이성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몸에도 꽃들을 그려 넣은 뒤 처제인 여자와 함께 교합의 절정을 맞는다.

연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도중에 탈진해 죽을지라도 필사적으로 태어난 곳으로 회귀한다. 사마귀, 메뚜기, 수벌 등 몇몇 곤충들의 경우, 교미한 후 몇 시간 안에 죽고 만다. 프로이트는 하등 동물들에게 있어서 죽음을 무릅쓴 회귀와 교미를 추동 시키는 이 강력한 내적 힘의 정체를 ‘타나토스(죽음 본능)’이라고 해석했다. 「몽고반점」에서 ‘가슴을 움켜쥐며’, ‘닥치는 대로 빨며’,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를 내면서 ‘전율’과 함께 이루어지는 여자와 형부와의 성행위는 이런 곤충들의 교미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것이 자신은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회적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성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이 계속해서 들렸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낸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전율했다. 그는 지금까지 섹스할 때 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교성은 여자들만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미 흠뻑 젖은 몸, 무서울 만큼 수축력있게 조여드는 몸 안에서 그는 혼절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몽고반점」, 138쪽)

만족스러운 교미 과정 속에서 곤충들의 에로스 에너지가 전부 소진되고, 그 순간 죽음 본능이 마음껏 자기 목적을 달성하듯이, 남자의 ‘정액’이 분출되고 여자의 ‘눈물’이 떨어지는 절정의 순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 역시 에로스와의 강한 충돌에서 승리를 거머쥔 타나토스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현실원칙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쾌락원칙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상충하는 욕망들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남자는 처제의 몸에 강렬한 매혹을 느낀다. 몽고반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두 가지 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우선 그것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며, 두 번째로 연한 초록빛을 띄고 있는 몽고반점이 그 색채 때문에 광합성을 하는 식물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내가 탄생한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어머니의 자궁은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완전한 공간이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 그에 대한 아내의 회상에서도 드러나다시피 그는 자궁과 같은 절대적 안식처를 일상에서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따금 새벽에 깬 그녀는 불 켜진 욕실에 들어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가, 물을 받지 않은 욕조 속에 옷을 입은 채 웅크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불꽃」, 163쪽)

따뜻한 물이 고이고 빠지는 욕조는 양수로 아이를 품는 자궁 속의 공간과 유사하며, 눈을 감은 채 웅크려 있는 그의 모습은 태아의 형태와 닮아있다. 남자는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모성의 품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런 욕망이 어머니와의 신체적 분리가 이제야 막 이루어진 태아의 흔적, ‘몽고반점’에 대한 집착으로 발발하게 된 것이다. 몽고반점을 식물적 속성으로 보는 두 번째 관점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깊게 내려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며, 땅-자연(Mother Nature)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생명체이다. 자궁을 떠나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필연적 운명과 자연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에만 살 수 있으며 자신 역시도 자연에 포섭되어 있는 식물. 이런 대조는 남자로 하여금 ‘몽고반점’이라는 삶 이전의 흔적, 식물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처제에게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땅과 모성의 품으로 ‘하강’하고 ‘돌아가고자’하는 욕망 외에 하늘로 높이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과 가치관을 담아내는 비디오 아트 작업에 날아가는 새나 날아오르는 나비떼와 같은 상승의 이미지들을 등장시키고자 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알 수 없는 생명의 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는 말했다.

지우가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영화처럼 발자국에서 꽃이 피어나도록 애니메이션을 넣을까? 아니,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게 좋겠어. (「나무불꽃」, 162쪽)

아내의 신고로 그와 여자를 붙잡기 위해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는 베란다로 달려가 난간을 뛰어넘어 ‘날고자’ 잠시 욕망했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인간이 그 생이 지속되고 있는 이상 자궁이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날고자 하는 욕망도 결국에는 불가능한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상승과 하강, 이 상충되는 욕망이자 근본적으로 충족 불가능한 욕망들은 그가 땅에 발붙이고 현실원칙을 통해 살아가게 만드는 대신에 많은 것을 배반하고 쾌락원칙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쾌락원칙도 아니고 현실원칙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여자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자는 쾌락원칙보다도 더 근본적인 힘처럼 이따금 쾌락원칙을 무시하듯이 출현하는 ‘반복강박’에 의해 지배당하는 ‘외상성 신경증자’라고 볼 수 있다. 외상성 신경증자들은 끔찍했던 외상의 흔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정신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타협책으로, 외상을 입은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악몽을 반복해서 꾼다. 그들의 정신은 억압된 외상이 처음 발생한 순간에 고착되어 있다. 꿈에 대한 그녀의 반복되는 고백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외상의 원인은 두 가지 지점에 놓여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은 개를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매고 죽을 때까지 달리게 하는 잔인한 방식으로 죽인 후에 다같이 그 개를 먹었던 기억이다. 다른 하나는 어느 날 아침을 먹던 남편이 여자의 손가락을 베면서 들어간 고기 속 식칼의 이를 가지고 매우 화를 냈던 사건이다. 남편과의 사건이 있은 다음날부터 여자의 꿈은 시작된다. 압도하는 고깃덩어리들과 피가 묻은 자신의 육체와 피 웅덩이에 번쩍이는 자신의 눈 등의 이미지들이 반복되는 것은 고착된 외상 장면이 상징화되어 재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여자의 트라우마 가운데에는 ‘폭력적인 아버지’ 와 ‘의사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개를 죽이고 그 미각을 즐겼던 아버지. 아내의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채 자신의 얄팍한 안위를 걱정하는 남편. 그리고 육식을 거부하는 자신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응대하는 남편과 폭력을 사용해 억지로 먹이려는 아버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침묵으로 견뎌내는 여자를 통해서,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해 동물성(육식성)으로 물들어있는 사회 전체 질서를 상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일반적으로 ‘소망충족’에 의해 발생하는 꿈들과 달리 외상성 신경증자의 꿈은 ‘반복강박의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고 한다. 이들은 안전한 수면 상황 속에서 외상장면을 거듭 직면함으로서 낯설고 무기력했던 외상 상황에 대한 ‘모종의 적응’을 시도하는 것이다. 반복강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무런 외상도 없었던 편안한 상태로 회귀하는 데 있다. 위의 해석을 다시 도입해 본다면, 주인공 여자에게 있어 외상을 입기 이전의 세계는 인간이기 이전의 세계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순간, 속하게 된 사회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본성이 만연해 있는 거대한 동물성의 사회였기에 여자는 상처 입었고,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과정이자 사회에서 멀어지기 위한 방편으로 식물이 되기를 택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기체인 인간의 몸이 식물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불가능한 꿈이다. 끊임없이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 안에 놓여있을 때에만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자는 동물성에 대한 극렬한 거부를 통해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내장을 퇴화시키고 마침내 말과 생각까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세상의 폭력성을 거부함으로써 살아가기 위한 이런 그녀의 노력, 즉 생을 향한 의지와 본능(에로스)은 역으로 맹렬하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타나토스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식물로서라도 살아보려는 그녀의 의지가 오히려 사회와 분리되어 정신병원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밟아왔던 수순대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남게 되었다.

4. 다프네 ─ 탈주하는 ‘식물-되기’를 향한 꿈

다시 다프네로 돌아가자. 다프네는 폭력적인 세계에 저항하기 위한 방식으로 식물이 되기를 택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 일차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후 그녀의 잎사귀들은 ‘월계관’을 만드는데 쓰였다. 남성의 지배와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의 산물이 다시 역으로 남성의 승리를 빛내주는 상징물로서의 월계관으로 탄생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식물-되기’를 통해 동물성의 폭력적 사회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데 실패한 여성 주인공 위로 다프네가 겹쳐져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강의 변화한 소설 속에서 여성의 육체는 새로운 지점에 위치한다. 그녀가 새롭게 구성해낸 몸은 그간 남성적 질서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관습화된 표상으로서의 ‘훼손된 몸’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식물이 되기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자연(Mother Nature)과의 자매애를 강조하는 에코 페미니즘을 상기시키는 면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드러움과 돌봄이라는 ‘모성적인 몸’으로서의 신체와도 거리가 멀다. 동물의 폭력성을 경멸하며 식물이 되기를 갈망하는 과정을 통해 변화된 몸은 동물적인 식욕과 성욕을 보존하고 있는 기이한 식물의 몸으로서,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영역에도 자신을 정착시키지 않는다. 남성/여성, 폭력성/모성, 동물성/식물성 등의 이분법으로부터 출발되었으나 한강의 소설 속 여자에게 남은 몸은 이런 이분법들을 교란시키는 몸이자,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몸이다. 이는 단순히 식물로의 변신이라는 환상을 실현해내는 대신에, 이 모든 환상을 제거해버린 서사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더욱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성을 배태한 식물’의 몸이 사회에 정착하고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힘을 갖지 못하고 타나토스에게 끌려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를 향한 물음들이 다시 여기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는 것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신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기관 없는 신체’로 귀착되지 않기 위해 탈영토화라는 본래의 목적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관들을 ‘신의 심판’이라는 하나의 중심에 복속시켜버리는 유기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이점에 대해 인식하면서 한강 소설 속 여자들은 탈주를 재시도해야 한다. 여자의 몸은 모든 기관을 제거하고 지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으로 충만한 탈주의 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동물로도 식물로도 규정되지 않는 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야 한다.

한강의 소설에서는 물질로서의 몸 자체의 이물적인 속성에서 오는 고통과 소통 불가능에 관련한 절망들이 계속해서 그려져 왔다. 「아기부처」에서는 수려한 얼굴과 상반되는 화상으로 뒤틀린 몸을 가진 남편과 이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를 감추지 못하게 된 아내의 불화,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되는 아내의 토악질이 있다. 「노랑무늬영원」에서는 사고로 인해 더 이상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들이 놓여있고, 「왼손」에서는 뇌의 통제력을 완전히 벗어나 주인공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폭력과 성적인 본능을 제멋대로 드러내는 왼손이 있다. 한강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의지 바깥에 있는 몸의 고통들 뒤에는 언제나 가까운 타인들을 비롯해 세상 전체와 소통되지 않는,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슬픔들 속에 침몰되지 않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 안의 ‘아기부처’와 조우하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재생하는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을 발견하며 이전의 삶을 견뎌내고 탈주해 또 다른 삶을 모색해왔다.

이렇게 한강의 소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글을 쓰다 죽고 싶다’라는 작가의 귀기 어린 말에서도 짐작되다시피 글쟁이로서의 업을 타고난 듯한 그녀의 글은 삶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지긋이 바라보는 진지함과 일상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보여주면서도 자기 갱신의 노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외계로부터의 타전’, ‘무중력 공간의 탄생’, ‘무재현의 세계’ 등으로 일컬어지며 지루한 동어반복의 위기와 절망 속에 빠져있는 듯한 2000년대 한국 문학 속에서 한강이라는 작가의 존재는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채식주의자’에서 이분법을 교란하는 식물로의 변신을 통해 더 강하고 아름다워진 그녀의 소설이 계속되는 창작 활동을 통해 또다시 이를 뛰어넘어 탈주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