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일본 만화는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 허무주의와 오타쿠적 몰두를 거쳐 다시 전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옹호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전쟁관을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박순애 호남대 교수(일본어학과)는 최근 출간된 반연간지 ‘일본공간’(논형刊)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일본인의 전쟁관’을 발표했다.

◆50·60년대: 전쟁의 공포에서 ‘기술입국’ 염원으로

패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전쟁의 공포를 표현한 만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鐵腕アトム)’은 로봇 아톰이 망가져 단순한 기구로 전락하는 장면에서, 신(神)이었던 일왕이 패전으로 보통 사람이 된 사실을 연상시키면서 피학적 두려움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데즈카의 만화는 낙원에서조차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핵전쟁의 위기감도 반영돼 있었다. 전후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난 단카이(團塊) 세대가 청년기에 접어든 1960년대에는 일본이 패한 것은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서브마린 707(サブマリン707)’은 반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투기술이 뛰어난 잠수함을 묘사함으로써 기술 입국에 의한 일본의 부흥을 상징했다.

왼쪽부터 철완 아톰, 데빌 맨

◆70·80년대: 탈이념과 허무주의, 오타쿠

일본 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1970년대에는 종래의 이념에서 벗어난 만화가 나온다. ‘데빌 맨(デビルマン)’은 인간과 문명에 대한 불신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을 묘사해 깊은 허무주의를 드러냈다.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戰艦ヤマト)’는 지구의 파멸을 구제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 전함 야마토(大和)를 미래 전쟁의 상징처럼 그렸다. 특정 대중문화에 집착하는 개인주의적인 ‘오타쿠’가 생겨난 1980년대에도 이런 종말론적인 경향은 계속됐다. ‘드래곤 볼(ドラゴンボ―ル)’과 ‘아키라(アキラ)’는 죽음과 직면한 허무주의를 그린 대표적인 만화들이었다.

왼쪽부터 아키라, 전쟁론

◆90년대 이후: 이념의 재등장과 제국주의 옹호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다시 심각한 이데올로기를 밑바탕에 깐 만화들이 등장한다. ‘원령공주(もののけ姬)’는 신화적 모티브 속에서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다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은 ‘구속된 강대한 힘’이라는 개념과 복잡한 줄거리를 통해 인류 구원의 문제와 미래의 일본인상을 그렸다.

한편 같은 시기 ‘전쟁론(戰爭論)’처럼 태평양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노골적으로 긍정하고 반미주의를 주창하는 선동적인 만화도 출현했다.

박순애 교수는 “19세기 일본의 대중적인 판화 그림 니시키에(錦繪)가 임진왜란 등 침략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아 일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