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채링 크로스 가(街) 120번지 보더스(Borders) 서점 2층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테이블에는 좀 전에 훑어본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 지(紙)가 지난 주 ‘올해의 책’으로 꼽은 ‘정치 계급의 승리’와 ‘템즈: 성스러운 강’을 골랐습니다. ‘정치 계급의 승리’는 영국 정치가 잘못돼 가고 있는 이유를 직업 정치인의 등장에 있다고 꼽습니다. 정계 바깥에선 변변한 직업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 애송이들이 정치를 망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네요. ‘템즈’는 제목 그대로 시내를 가로지르는 템즈강을 통해 런던의 역사를 돌아본 책입니다.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서점 안에 있는 카페에 보고 싶은 책을 서가에서 골라 마음대로 갖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서점 ‘반스앤노블’처럼 이곳에도 스타벅스가 진출해 있습니다. 덕분에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책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주위엔 서점에서 고른 책을 뒤적이고, 랩탑 컴퓨터를 들여다보거나,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길 건너편엔 창립 100년을 넘긴 서점 포일스(Foyle’s)도 성업중입니다. 3층엔 헌 책만 파는 코너도 있더군요.

채링 크로스 가 근처엔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와 오페라의 본산 로열 오페라하우스와 뮤지컬·연극을 올리는 극장 30곳이 몰려 있습니다. 하루 종일 관광객과 연극·뮤지컬 팬들로 붐비는 곳이지요. 이런 금싸라기 같은 땅에 보더스와 포일스뿐 아니라 공연·미술 등 예술 서적을 파는 전문 서점이나 헌 책방 10여 곳이 손님을 맞고 있습니다.

앤서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포드가 주연한 영화 ‘채링 크로스 가 84번지’의 무대도 바로 이곳입니다.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1949년부터 20년간 이 곳 헌책방 직원 도엘과 편지를 주고 받은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답니다. 런던과 뉴욕의 전후 생활을 배경 삼아 문학과 책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편지로만 왕래할 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지요. 국내에도 얼마 전 궁리출판사에서 한프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사랑에 빠진 영국 남자 휴 그랜트도 서점 주인이네요. 책방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꿈과 로망을 되찾는 곳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주말, 서점에 한번 들러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