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22일 주형광이 31살의 나이로 은퇴하자 롯데를 이끌었던 과거의 에이스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더 많다. 영광의 기억도 훗날에는 상처뿐인 훈장이 되어버렸다. 돋보기로 햇빛의 초점을 맞추면 까맣게 확 타버리는 것처럼 순간은 뜨거웠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남는 것은 검은 재였다. 비교적 롱런한 투수도 그 나름대로 또 애환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부산 야구 그리고 롯데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들이었다는 점에서 팬들의 가슴은 더욱 시리다.

▲ 최동원

‘전설’ 최동원은 선동렬과 함께 한국야구에 길이 남을 불멸의 투수로 기억된다. 특히 1984년은 그야말로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해였다. 그해 51경기에서 14차례 완투 포함해 27승13패6세이브 방어율 2.40, 탈삼진 223개를 기록했다. 다승·탈삼진 1위를 비롯해 페넌트레이스 MVP와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휩쓸었다. 27승은 역대 최다승 부문 2위이며 탈삼진 223개는 역대 1위 기록이다.

무엇보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끈 장면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며 일어나서도 안 될 사건이었다. 선발로만 4차례나 등판하는 등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4승1패 방어율 1.80을 기록했다. 159타자를 상대해 무려 40이닝을 던졌다. 이는 여전히 한국시리즈 최다 투구이닝으로 남아있다. 한국시리즈 최다 탈삼진(35개)·피안타(32개) 모두 그때 그 최동원이 아니면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흔적들이다. 그해 한국시리즈 MVP로 유두열이 선정된 것은 너무 즉흥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최동원의 통산 성적은 액면으로 볼 때 분명 훌륭하나 위대하지는 못하다. 최동원은 프로 통산 248경기에서 103승74패26세이브를 기록했다. 최동원이 통산 누적기록에서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부문은 완투(80회)밖에 없다. 하지만 최동원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기간이 불과 8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조금 더 오래 뛰었더라면 통산 누적기록 순위도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비율기록에서 최동원은 단연 눈에 띈다. 통산 방어율이 불과 2.46으로 선동렬(1.20) 다음이다. 최동원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이었던 1990년을 제외한 나머지 7시즌 동안 방어율이 2점대 밑이었다. 그리고 데뷔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으로 14경기 이상 완투를 하며 200이닝 이상 던졌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최정상이었다. 그러나 살인적인 등판 일정에는 장사도, 고무팔도 없었다.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투구 폼으로 150km 내외의 강속구를 뿌리는 파이어볼러에게 관리는 필수였지만 그 시절에는 관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1988년부터 내구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최동원은 그 해 11월22일, 뼈를 묻을 것으로 생각한 롯데 유니폼을 강제적으로 벗어야 했다. 안 그래도 구단과 잦은 마찰을 빚었던 최동원은 선수협 결성 및 활동의 주동자로 구단에 밉보인 나머지 초대형 4대3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이적했다. 당시 최동원을 받는 대가로 삼성이 롯데에 내민 카드가 바로 김시진이었다. 최동원은 트레이드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거부를 하다 1989시즌 중에야 삼성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삼성에서 2년간 7승을 거두는 데 그치자 과감하게 유니폼을 벗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살. 선수생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너무 이른 나이에 결정한 은퇴였다. 현재 최동원은 한화 2군 감독으로 재임 중이며 롯데와의 관계 회복도 진전된 소식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부산과 롯데팬들은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불꽃처럼 타올라 한국시리즈 4승이라는 신화를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 윤학길

윤학길은 롯데를 이끈 투수들 가운데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1997년 은퇴했다. 은퇴 당시 나이는 36살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시점이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퇴할 때까지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해 이른 나이에 은퇴하거나 아니면 롯데로부터 버림을 받은 에이스 선후배들의 사정을 볼 때 윤학길은 비교적 평탄하게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또 마쳤다. 윤학길은 부산과 롯데의 화끈하고 열정적인 기질과 달리 깔끔한 외모로 귀공자 이미지를 풍겼다. 그래서 황태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독한 황태자’였다.

부산상고-연세대 그리고 상무를 거쳐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데뷔 첫 해 25경기에서 1승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방어율은 2.76이었다. 이듬해부터 선발진에 진입한 윤학길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철완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1990년을 제외한 6년간 매년 두 자릿수 승리와 완투경기 그리고 200이닝 이상을 투구했다. 특히 1988년에는 18승을 거두며 다승왕에도 올랐다. 오른손 정통파 투수로서 묵직한 구위를 자랑한 윤학길은 선발등판 때마다 지든, 이기든 한 경기를 확실하게 책임진다는 믿음을 줄 정도로 듬직함 그 자체였다.

프로 통산 12년간 308경기에서 117승94패10세이브를 방어율 3.33을 기록한 윤학길은 완투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프로야구 최고로 남아있다. 무려 100경기에서 완투하며 이 부문 한국프로야구 역대 통산 1위에 올라있다. 통산 231경기에 선발등판했으니 완투율은 무려 43.3%였다. 완투승도 74승으로 역대 1위. 그러나 윤학길은 너무 듬직한 게 문제였다. 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입단 초에는 최동원, 중고참이 됐을 때에는 박동희·염종석·주형광 등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활약한 것만큼 주목받지 못한 것도 비운이라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독하리만큼 뒷받침하지 못하며 26차례의 완투패를 넋놓고 바라본 허약한 롯데 타선도 윤학길에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롯데 투수코치를 거쳐 현재는 상무 코치를 맡고 있다.

▲ 박동희

롯데는 전통적으로 방망이보다는 마운드로 승부하는 팀이었다. 부산지역에 에이스가 많이 배출된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최동원의 믿기지 않는 투혼으로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따낸 1984년. 그 즈음 부산지역에서는 최동원의 대를 이을 유망주가 한창 뜨고 있었다. ‘슈퍼 베이비’ 박동희였다. 150km대 강속구를 앞세워 고교타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한껏 주목을 받은 주인공이 바로 부산고 소속의 박동희였던 것이다. 특히 부산고 3학년 시절인 1985년 봉황대기에서는 34이닝 무실점이라는 믿기지 않는 활약으로 부산고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려대 진학 후에도 부동의 국가대표 에이스로 승승장구하며 ‘제2의 선동렬’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1990년 고려대 졸업 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던 박동희는 당시 신인 최고 계약금에 달하는 1억5200만 원에 롯데에 입단했다. 프로 데뷔전이었던 1990년 4월11일 대구 삼성전에서 구원등판, 4이닝 동안 14타자를 상대로 탈삼진 10개를 잡아내며 4이닝 1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신인 데뷔전 최다 탈삼진이었다. 데뷔 첫 해 10승7패7세이브 방어율 3.04로 활약한 박동희는 1991년 14승9패3세이브 방어율 2.47을 기록하며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다. 1992년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에서는 2승1세이브를 따내며 당당히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1994년에는 마무리투수로 변신해 31세이브를 거뒀다. 이는 지금도 롯데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세이브로 남아있다.

그러나 박동희는 1995년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하향세를 걸었다. 프로에서는 입단 첫 2년간 규정이닝을 넘긴 것이 고작인 박동희였지만 고교·대학 시절 꾸준히 축적된 피로가 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묵직한 구위가 힘을 잃자 단조로운 구종과 들쭉날쭉한 제구력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불거졌다. 파워피처답지 않게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그런 박동희를 롯데는 미련 없이 내보냈다. 1997년 6월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보낸 것이다. 삼성에서 한때 부활 조짐을 보인 박동희는 그러나 또다시 부상 악재에 시달리며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2002년 은퇴했다. 프로 13년 통산 251경기 59승50패58세이브 방어율 3.68.

박동희는 지난 3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떴고, 롯데는 그를 위해 4월10일 홈개막전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다. 선수생활 마지막은 삼성이었지만 그래도 부산과 롯데의 선수라는 정서가 강했던 것이다. 여전히 박동희는 롯데 투수, 그러나 기량을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기억된다.

▲ 주형광

최동원-윤학길-박동희. 순서대로라면 주형광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형광이 맞다. 현역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주형광의 나이 이제 겨우 31살이다. 주형광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최고령’ 송진우(한화)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현대 스포츠의학과 관리시스템의 발달로 40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주형광은 유니폼을 벗었다. 무려 한 달 넘게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어있는 어수선한 구단 사정에서 등 떠밀리듯 은퇴한 감도 없지 않지만 주형광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부산과 롯데였다.

부산고 시절부터 주형광은 부산야구와 롯데야구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았다. 1994년 롯데 입단 당시 계약금(9200만 원)은 고졸 신인 최고액이었다. 기대대로 주형광은 데뷔 첫 해부터 단숨에 롯데 주축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롯데의 다승·방어율·탈삼진·승률 1위가 바로 주형광이었다. 게다가 최연소 승리투수(18세1개월18일), 최연소 완투승(18세1개월18일), 최연소 완봉승(18세3개월), 최연소 세이브(18세1개월14일) 등 각종 최연소 기록들을 세웠다. 지난해 ‘괴물’ 류현진(한화)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최연소 200탈삼진과 최연소 200이닝-200탈삼진 기록도 주형광이 보유하고 있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데뷔 첫 7년간 주형광은 77승을 쌓아올렸다. 특히 1996년에는 18승·221탈삼진으로 2관왕에 올랐다. 무엇보다 데뷔 첫 7년간 무려 5시즌이나 180이닝 이상 던졌다. 허리디스크로 의병제대하며 제대로 된 동계훈련도 치르지 못한 1997년에는 선발로 20경기, 마무리로 12경기에 출전하는 등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무리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던지는 주형광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주형광은 마지막 7년간 겨우 10승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했다. 선수생활 마지막은 원포인트 릴리프였다. 프로 14년간 통산 성적은 386경기 87승82패9세이브 방어율 3.83.

강속구가 아니라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투수였던 만큼 충분히 롱런할 수 있었지만, 성적지상주의가 끝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 중 은퇴마저도 거의 최연소 기록을 세우고 만 주형광은 롯데의 일본 코치연수를 제안을 받아들여 내년부터 지도자 수업을 쌓을 계획이다.

▲ 염종석

이제 남은 것은 그밖에 없다. 염종석. 다수의 롯데팬들은 최동원 다음으로 윤학길-박동희를 건너 염종석을 먼저 떠올린다. 1992년 금테안경을 쓴 투수가 따낸 우승이라는 드라마 같은 결실이 흡사 1984년 최동원의 투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염종석은 1984년 당시 최동원보다도 훨씬 어린 투수였다. 최동원마저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투혼이라는 무게의 짐은 어쩌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직행한 19살 짜리 고졸신인 투수에게는 너무 막대한 짐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1992년 롯데 마운드에는 윤학길과 박동희가 있었지만 페넌트레이스 때부터 축적된 피로는 쌓이고 쌓여 이미 넘쳐흐른 상태였다.

1992년 부산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염종석은 그해 35경기에서 17승9패6세이브 방어율 2.33을 기록했다. 방어율 1위에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와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명백한 혹사였다. 염종석은 무려 204⅔이닝을 소화했다. 물론 등판 간격만 철저하게 지켜졌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해 염종석이 등판한 35경기 중에는 구원으로 등판한 13경기가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선발로 등판한 22경기 중 무려 13경기에서 완투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염종석은 6경기에 등판, 30⅔이닝을 던졌다. 구원등판도 3경기나 있었다. 그러나 입단 전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으며 145km 내외의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를 무기로 삼은 19살 염종석에게는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1992년은 염종석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가 되고 말았다. 염종석은 2년차였던 1993년 10승을 따낸 것을 끝으로 단 한 시즌도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리지 못했다. 1995년(2.98) 이후 2점대 방어율도 먼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1992년을 비롯해 7시즌을 규정이닝을 넘겼으나 예전의 이닝이터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염종석의 완투경기는 9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팔꿈치 수술만 두 차례나 하며 오랜 재활과정을 거친 염종석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묵직한 직구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던지지 못했다. 최동원은 5년 가까이 불꽃을 태웠지만 염종석은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이 같은 갖은 곡절에도 불구하고, 15년간 프로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염종석에게 더욱 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프로 통산 335경기 93승132패14세이브 방어율 3.76. 아직 염종석의 선수생활은 끝나지 않았고, 부산과 롯데팬들은 그의 통산 100승을 기다리고 있다.

최동원-윤학길-박동희-주형광-염종석.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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