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노인은 말없이 박카스를 건네주고는 이내 자신에게 훔쳐갔다며 노발대발이다. "삼겹살 먹고 싶어. 삼겹살 줘"라고 떼를 써서 삼겹살을 구워주면 삼겹살이 아니라고 밥상을 엎는다. 집안 가구를 죄다 뒤엎고 식칼을 들고 지붕에 올라 서럽게 우는 날도 있었다. 무표정하다가도 소년 같은 웃음을 보여준 치매 걸린 그 노인. 때때로 정신이 돌아오기도 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궁중요리사 '대령숙수'는 손주를 위해 국을 끓이다 세상을 떴다.

"고사리 장마다. 고사리 장마가 지면 바다에 나간 배가 돌아오지 않아. 고사리 장마 때는 그렇게 이별하는 거야."

영화 '식객'(전윤수 감독)에서 주인공 성찬(김강우)의 조부로 나와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와 몸짓 만으로 관객의 가슴에 청국장 맛을 우려낸 배우. 하지만, "얼굴은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름은 전혀 모르겠다"는 게 관객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영화 '식객'에서 주인공 성찬(김강우)의 조부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궁중요리사 '대령숙수' 역을 맡은 배우 정진. 치매에 걸린 노인 역을 맡았다.

"내 이름 아는 사람 거의 없지.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명회다', '왕건에 나왔던 그 아저씨다' 정도야."

배우 정진(66). 1968년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으로 출발해 올해로 연기인생 39년째를 맞았다. 그동안 연극과 TV드라마,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만년 단역 또는 조연이었다. 1984년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에서 '한명회' 역을 맡아 조금 뜨긴 했지만 그게 전부.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없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주로 '가난한 할아버지'로 무대에서 살아왔다.

여의도에서 실제로 만난 노(老) 배우의 주름살은 영화관에서 볼 때 보다 더 깊어 보였다. 하얀 서리가 머리 위에 소복하다. "영화 식객에 출연할 때 별도의 분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고 했다. 회색 양복에 겨자색 티셔츠, 푹 눌러쓴 회색 모자…. 겉모습만 보면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가 따로 없었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인사 대신 이 말부터 건넸다. "내가 말할 게 뭐가 있다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성찬 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하자 "나는 (내 연기에) 아쉬운 것만 많다"며 양복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영화 촬영 내내 별도의 분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깊게 패인 주름과 흰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식객' 관객이 150만명이 넘었습니다. 요새 잘 나갑니다.
"영화는 재미있다고 하는데, 나는 몰라. 정말 그래?"

-자신이 출연한 영화인데 모르세요?
"판단은 관객이 하는 거지 내 몫이 아니니까 잘 몰라. 신경도 안 쓰고. 우리 집사람이 구경시켜 달라고 하니까 한 번 같이 가서 봐야지. 시사회 때 보긴 봤는데 감독(전윤수)이 잘 처리했더라고. 음식 영화가 참 어려운 거고, 만화가 워낙 잘 팔려서 부담됐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 잘 됐으면 좋겠어."

-영화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셨나요?
"대학로에서 연극(제목 '지대방')을 하고 있는데 찾아왔어. 감독하고, 남녀 주인공 둘하고. 같이 해 보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지."

전윤수 감독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배우를 원했다"고 말했다. 전 감독은 "마르고 주름이 많은 외모도 잘 어울렸지만, 무엇보다 정진 선생님의 얼굴에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랄까, 연민이 잘 묻어났다"고 캐스팅한 이유를 밝혔다.

-선생님 치매 연기가 좋다고 주변에서 그러던데요.
"치매 연기를 따로 배운 건 아니고, 내 나이 정도 되면 주변에서 뇌졸중 걸렸던 사람들, 치매에 걸린 사람들 자주 보게 돼. 노인들 많은데 자주 가서 관찰도 좀 했지. 그리고 내 외모가 워낙 할아버지 같잖아. TV에 출연한 이후 줄곧 단골 할아버지 역을 맡았으니까…."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건 잘 모르겠어. 아쉬운 장면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극 중에서 내가 여기자(이하나)에게 박카스를 주고 나중에 도둑으로 몰았잖아? 얼마 뒤에 내가 여기자에게 다시 박카스를 줄 땐 여기자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걸 내밀어서 나를 약 올리지. 거기서 내가 한 컷 만이라도 뭔가 반응을 줘야 했던 것 같아. 그 부분이 아쉽더라고. 물론 연기자 욕심이 끝도 없고 그게 군더더기가 될 수 있지."

-주연배우 김강우씨가 선생님을 업고 메밀밭을 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 몸이 워낙 가벼워서 진짜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고, 감정 이입을 하기가 쉬웠다고 하더라고요. 몸무게는 몇 kg나 나가세요?
"몰라. 한 47kg 정도? 내 키가 160cm 정도 되니까 가볍나? 몸이 좋을 때는 54kg 정도 나간 적도 있는데 나이 먹으니까 조금씩 빠지더라고."

-술·담배를 워낙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몸무게가 빠진 건 아니야. 평소에 소식하거든. 술은 기회만 있으면 마시긴 하지만 안주는 안 먹어. 될 수 있으면 고기도 안 먹고. 나 건강해. 건강에 문제 생긴 적 한 번도 없어. 몸이 튼튼하니까 술을 더 마시게 되더라고."

-원래 연극부터 시작하셨죠? 어떤 계기로 연극 배우가 되셨는지요.
"허영심이지 뭐. 뭐 큰 실력이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 어쩌다 바람이 든 거지. 1950년대 중반에는 코미디언 영화가 아주 성행했어요. 그때 내가 중학생이었는데, 주변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김희갑 선생님하고 나하고 닮았다고 하더라고. 내 별명이 또 합죽이였잖아? 영화도 조조할인 막 보러 다녔지. 공부는 바닥이었고 노는 거 운동하는 거 좋아하고 그랬는데 인천에 배우학원이 생기더라고. 조금 다니다가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서울에 있는 학원으로 옮겼어.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하여간 배우가 되고 싶었어. 그때는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거의 없었지. 그래서 배우학원이 참 순수하게 아카데믹 했어. 요새는 우후죽순으로 배우학원이 생기고 배우지망생이 TV출연하는 연결고리가 되는 모양새로 바뀌었지만 말이야. 결국에는 동국대 연극학과에 입학했지. 좀 지나니까 연극영화과로 바뀌게 된 거고."

-1968년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으로 연기자 인생을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군대 다녀와서 시작했지. 연극인이셨던 고 이해랑 선생께서 동국대에서 직접 연기 지도를 하기도 하셔서 참여했었어. 그때 대형버스를 타고 지방을 다녔어. 운동장에 차를 세우고 세트를 조립해서 공연을 했지. '한여름밤의 꿈' 같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국식으로 번안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어. 악단도 같이 다녔고, 함께 노래도 불렀지. 거기서 한 2년 있었나? 버스전복사건도 생기는 등 뒤숭숭해서 나왔어. 내가 나오고 1년 정도 지나서 이동극장도 없어졌지."

-1979년 TBC 공채시험으로 탤런트가 되셨죠?
"그게 공채로 돼 있기는 한데 누가 시켜준 거야. 출연하라고 해서 출연했지. TV드라마에서도 대부분 단역이나 감초 역할이었지. 주인공 할 나이도 지났고, 내 생김새도 주연배우 감은 못되잖아? (웃음). 그 후에 MBC베스트극장이나 TV문학관 같은 곳에서는 나름 중요한 조연도 했어."

-조연이나 단역만 했으면 생활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요. 
"연극배우 생활이 뭐 뻔한 거지. 그때는 대한민국 전체가 가난했을 때였잖아?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지. 텔레비전(에 출연) 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긴 했어. 뭐, 교통비 꾸러 다니지는 않게 됐으니까. 결혼도 1979년에 했어. 원래 연극만 할 때는 결혼만 생각하면 겁이 나더라고. 생활비를 마누라에게 조달해야 하잖아? 봉지 쌀이라도 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연극 몇 개월을 해도 출연료 받기 힘든 시절이 많았지. TV 나오면서 생활비도 좀 벌 수 있게 되니까 그때 결혼을 했지. 우리 집사람 큰 욕심 안 부리고 사는 사람이니까 연극하느라 조금 힘들어도 이렇게 살아온 거지. 부인이 미인이라고? 허허허. 미인은 아니고 그냥 체격이 나보다 좋지. 이 말하면 나 혼나려나?"

만년 단역이나 스쳐 지나가는 조연에 그칠 것 같았지만 1984년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편에서 '한명회' 역을 표독스럽게 소화하면서 유명한 조연으로 반짝했다.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기도 한다. 아직도 중년 시청자가 그를 '한명회'로 기억하는 이유다.

-역설적으로 유순하고 순박한 천사 역할로는 빛을 못 보다가 권모술수에 능한 악역으로 나왔을 때 가장 인기가 높았습니다.
"배역의 의외성이랄까 그런 게 통했나 싶어. 드라마의 재미는 의외성이거든. 생긴 걸로만 봐서는 맞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예상을 뒤집는단 말이지. 그게 더 재미를 줬던 것 같아."

-악역을 주로 맡았으면 더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어. 한명회 역을 맡을 때 힘든 점도 많았어.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고 간신 정도로만 알았지. 칠삭둥이라는 것도 작가가 설정한 거야. 나중에 이덕화가 이 역을 맡을 때 귀를 크게 분장시켰잖아? 그건 기록에 없는 거거든. 당시 조선왕조 500년 신봉승 작가가 아주 해박한 분이니까 참고할 수 있는 얘기도 많이 해 주셨지. 이런 사극은 정사보다 야사 쪽 이야기가 공부에 더 도움이 돼. 그런 것도 찾아서 읽고 그랬어."

1985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명회 역 때문에 뒷주머니에 용돈이 좀 생겨서" 150석 규모의 소극장을 인천에 세우고, 연극을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다. "연기를 하는데 장소까지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야. 배우라는 게 전달자잖아. 작가나 연출자가 생각하고 있는 테마를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가 참 중요한데 그러면 결국 배우를 선택하는 건 작가나 연출가의 몫이 돼. 자기가 하고 싶은 배역이 있다고 그걸 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하고 싶은 연극, 연기를 하려면 결국 직접 자리를 만들어야 하지. 쉬운 일이 아니야. (돈 때문에)부부싸움의 연속이었지." 그러나 초대권 500장을 뿌려도 10~20명 정도의 관객만 소극장을 찾았다. 결국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대표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다. 2002년 또 다시 연극을 할 수 있는 카페를 열었다.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2004~2006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연극이나 TV출연은 하지 않고 예술감독일과 연출에만 매달렸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조정래씨의 소설 '아리랑'을 무대 위에 올려 매진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예술감독을 하면서 흥행을 위해서 '난타'나 '점프' 같은 공연을 가지고 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공연을 하자니 이건 연극이 아니라 꼭 장난하는 것 같고…. 조금만 진지하게 하려고 하면 관객이 안 들어와. 예술하는 사람들은 균형을 맞추기가 참 어려워. 그런데 '아리랑'은 되더란 말이야. 광복 60주년 이기도 했고 또 원작이 참 좋았으니까. 그때 욕도 많이 먹었어. 표가 없다고 말이야. 행복했지."

-그렇게 연극이 좋으신가요?
"물론 싫었을 때도 있었지. 배고플 때 말이야. 연극은 한 10번 출연하면 그 중 겨우 한 개가 성공해. 그걸로 배우는 버티는 거지. 한 번은 연극이 망했어. 뒤풀이때 망한 기념이라고 배우들에게 몇 천원짜리 반지를 하나씩 맞춰 주더라고. 그게 출연료야. 우리 집사람은 연극이 끝났으니까 쌀 됫박 거리라도 가져올 줄 알았는데 겨우 반지 하나야. 그러면 연극 때려치우라고 하지. 애들은 점점 크고 집사람한테 미안하지. '알았다'고, '때려치우겠다'고 했다가 누가 또 연극하자고 하면 또 하고…. 그런데 흥행이 되든 안 되든 간에 무대에 설 때 그 설렘이 참 좋아. 무대에서 집중할 때, 그걸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커튼콜을 할 때 많은 관객은 아니더라도 박수를 열심히 쳐 줄 때, 끝나고 동료들끼리 어깨동무하고 함께 소주 먹을 때…. 괴로움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그래서 연기를, 연극을 놓지 않는 거겠지 뭐."

그의 아들(28)과 딸(27)도 모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인천시립극단의 한 배우는 "술을 마시면 '두 자식과 함께 한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전했다.

"내가 그랬어. '너희가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거 어려운 길이다'라고. 그런데도 그게 하고 싶다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 지난 6월 딸이 결혼했는데 사위도 연극을 전공했어."

-요즘 젊은 배우들하고 연기를 하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글쎄, 비판하는 건 아니고…. 연기는 전달이잖아? 자신의 대사와 표정, 행동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전해야 하는데 말이야. 요즘 배우들은 전달에 약한 것 같아. 기본적으로 대사를 잘 전달 못해. 대사가 아니라 분위기로 간단 말이야. 그리고 배역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해.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갖는 한계지. 대본도 늦게 나오고 자기 장면 위주로만 연습을 해야 하니까…. 뭐 내가 간섭할 부분은 아니지만 말이야."

배우 정진은 드라마 '식객'에도 캐스팅 됐다. 요새 매주 1, 2회 촬영을 한다. 배역은 '자운선생'. 주인공 성찬과 라이벌 봉주의 스승으로 전통한식당 '운암정'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맛의 원로'다. 노 배우는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바람처럼 왔다갔다 하는 음식의 대가. 동가식 서가숙하고, 노숙도 하는 자유분방한 사람. 일선에서 좀 떠나 있지만 전통 음식의 맛을 지키려고 하는 열정을 가진 노인. 주방에서 떠났어도 맛에 대한 열정의 끈은 놓지 않는 '쿨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야. 요새 말로."

-그럼 선생님하고 비슷한 거 아닌가요?
"글쎄. (웃음)"

오후 2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2시간 후에 끝났다. 오후 7시에 인천에서 술 약속이 있다며 그 전까지 자신과 술 한 잔 하자고 기자를 붙잡았다.

"나는 연극이 좀 더 좋아. 영화나 TV는 조각연기를 하는 거잖아." "대학연극이 왜 그렇게 실험적이지 못해? 순수해야 하는데 상업적이야." "나이가 들고 보니까 연극이 정말 좋아. 같이 호흡할 사람이 무대에는 항상 있잖아. 무대에 서면 외롭지 않아." "연극도, 나 같은 노인도 폐기처분 하듯이 하면 안 돼.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있어."

수많은 대사를 쏟아낸 뒤 인천에 갈 시간이 됐다고 자리를 떴다. "나는 얻어먹는 술은 맛이 하나도 없다"며 끝끝내 자신의 카드로 술값을 긁었다. 영수증을 보지도 않고 꼬깃꼬깃 구겨 재떨이에 버렸다. 테이블 위에는 인터뷰 시작 때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 꽉 차 있었던 텅 빈 담배 두 갑과 빈소줏병 2병이 덩그러니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