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가 삼성이 집중관리해 온 로비대상 검사 명단 중 3명을 공개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13일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도 포함되어 있어 당장 정치권의 이슈로 부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검찰 내부에서는 수뇌부를 뇌물검사로 폭로한 핵폭탄급 발언내용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떠나 검찰의 이미지 실추와 여론악화 등을 우려하는 모습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용철 변호사가 밝힌 내용"이라며 삼성의 로비대상 검사로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와 이종백 국가청렴위원장, 이귀남 대검 중수부장 등을 지목했다.
삼성그룹의 금품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검찰 측 인사들의 리스트는 이른바 '떡값 검사'라는 이름으로 회자되어왔으나 실제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검찰 수뇌부가 기업체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폭로 대상이 됐고, 더구나 폭로자가 검찰 출신 인사라는 점에서 이번 발언의 파장은 가히 핵폭탄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제단 측은 "이 이름들을 특정 개인으로 보지 말고 재물에 길들여진 국가 기관의 상징정도로 여겨달라"고 의미를 애써 축소했지만 사상 처음으로 현직 검찰 거물급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뇌물수수 의혹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쉽게 수그러들기는 어려워보인다.
우선 검찰 내부는 벌집을 건드린 듯한 분위기다. 임채진 총장 내정자는 김경수 대검 홍보기획관을 통해 "김용철 변호사와 일면식도 없고, 다른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마주친 기억조차 없다"며 반발했다.
그는 자신이 삼성에버랜드 사건의 수사와 직접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삼성의 관리대상에 포함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제단 측이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이 임 총장 내정자를 만나 금품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고교 선배인 것은 사실이나 어떤 청탁이나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가 명단을 관리하는 역할만 맡고 실제 접촉은 다른 임원들이 담당했으며, 특정 재판과의 관련 여부와 무관하게 관리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리스트에 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파문은 청와대로도 직접 불똥이 튀고 있다. 삼성의 금품로비를 받은 것으로 지목된 이종백 前부산고검 검사를 지난 8월 국가청렴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임채진 법원연수원장을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로 지명한 것은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도 이날 천호선 대변인을 통해 "임채진 총장 내정자 본인이 (금품수수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국회 인사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어 진의여부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우나 청문회를 포함해 진행과정을 면밀히 지켜볼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선 입장을 밝혔다.
정치권도 이번 사건의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검찰 수뇌부가 삼성의 금품로비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수사를 검찰에게 맡기기 어렵다는 여론이 강해질 것이 자명하며 이 경우 특별검사제 도입 여론이 비등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특히 한나라당이 특검 도입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범여권의 정동영 이인제 문국현 후보는 '삼성 비자금 의혹'과 '반부패'를 키워드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검찰 로비 리스트 공개가 향후 대선 구도에도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로비의 주체로 지목된 삼성그룹도 사제단의 발표 이후 김 변호사의 주장이 '사실 무근'이며 '악의적 조작'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사제단 측의 폭로 내용이 단순한 로비 검사 리스트가 아니라 구체적인 로비 리스트 작성 정황과 전달시기, 금품수수 과정을 관리하는 방식 등을 검사들을 접촉한 삼성그룹 전현직 주요 임원들의 실명과 함께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반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여론의 파장이 쉽게 가라앉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날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주장을 빌어 "로비 대상 명단은 삼성 본관 27층 재무팀 관재파트에서 담당 임원의 방에 있는, 벽으로 위장된 비밀 금고에 보관돼 있으며 리스트에는 검찰의 직책과 성명이 있는데 담당자가 기재할수 있도록 빈칸으로 되어 있고 금품이 전달될 경우 연필로 담당자의 이름을 적어두는 방식으로 전달 상황을 관리했다"고 설명했다.
사제단에 따르면 전달되는 금품의 액수는 원칙적으로 500만원이며, 별도로 1000만원과 2000만원을 줄 경우는 김인주 사장이 직접 연필로 이름 옆에 써 넣었다고 덧붙였다. 임채진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의 경우는 지난 2001년 서울 지검 2차장때 김 변호사가 직접 관리대상에 넣었고 삼성 구조본의 인사팀장으로 부산고 선배였던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이 금품 전달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종백 현 국가 청렴위원장의 경우 검찰내 귀족 검사로 중요한 관리대상이었으며 제진훈 제일모직 사장이 관리를 맡았으다고 덧붙였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천주교 사제단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예를 걸고 검찰조직의 핵심인사 실명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사실 여부에 따라 검찰이나 사제단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