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전직 법무팀장인 김용철(金勇澈)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 의혹을 폭로한 데 이어 현직 이종왕(李鍾旺·58·사진) 법무실장(사장급)이 지난 9일 전격 사퇴, 파문이 커지고 있다. 이 실장은 왜 갑자기 사퇴했을까? 검찰이 주 초 본격 수사에 나설 것으로 알려진 비상상황에서 발생한 그룹 법무실장의 사퇴는 법조계와 재계 안팎에 큰 충격과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왜 지금 돌연 사퇴했나

10월 30일 김용철 변호사가 처음 삼성 비자금 의혹과 떡값 검사 의혹 등을 폭로했을 때만 해도 이 실장은 “내가 김 변호사를 직접 뽑지는 않았지만, 사후관리를 잘못한 책임이 있다”면서 “김 변호사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사표를 던지자 삼성그룹 수뇌부도 적잖이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질문에 이 실장은 11일 “이제는 삼성 내부에서도 가닥이 잡혀 가는 시점이라 사표를 냈다”고 했다. 삼성 법무실 관계자도 “수사가 시작되면 이 실장이 총괄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퇴할 수가 없어진다”며 “이 실장 스타일로 볼 때 나중에 누가 잘했네, 못했네 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번 ‘떡값검사’ 파문으로 친정인 검찰과 삼성그룹 모두에 부담을 준 데 대해 수사 착수 전에 책임지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를 앞둔 삼성 입장에서는 검찰 고위직 출신의 이 실장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할 때란 점에서 사퇴 시점에 대한 의문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왜 법무실장이 책임 지나

이 실장은 사퇴 직후 삼성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김 변호사의 부인이 올 8~9월 세 차례 협박성 편지를 보냈을 때 ‘법과 원칙에 입각해 대응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며 “결과적으로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회사에서 만류했지만 스스로 용납이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무실장은 참모일 뿐이다. 법무참모는 의견을 내지만 결정은 경영진이 하는 것이다. 또 김 변호사가 해온 일은 김 변호사를 고용했던 경영진이 잘 아는데, 왜 이 실장 혼자서 책임을 떠안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일부 시민단체는 “이 실장이 김 변호사의 주장을 ‘거짓 폭로’와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세우면서 전격 사퇴한 것은 개인 차원이 아닌 삼성그룹 차원의 대응일 것”이라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실장은 “전적으로 혼자서 생각하고 사퇴한 것으로 삼성과는 무관하며, 세월이 내 말을 증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8년 전에도 사퇴했던 이 실장

1999년 봄 이종왕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은 전격적으로 사표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 그는 이른바 ‘옷 로비’ 사건 수사에서 사직동팀 보고서 유출 혐의가 드러난 박주선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구속을 주장했으나, 검찰 수뇌부가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던 수뇌부가 박 전 비서관을 구속한 뒤 “당신 말대로 했으니 돌아오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검찰에 복귀하지 않았다. 법무부 검찰1과장과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장을 거치는 등 사법시험(17회) 동기 중 선두그룹으로 달려온 그였기에 충격은 컸었다.

그의 사시 동기 변호사는 “이 실장이 8년 전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를 아는 인사들은 이번 사퇴의 배경을 그의 꼿꼿한 성품에서 찾는다. 그는 이메일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대해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전격 사퇴를 통해 ‘허위 폭로’라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표를 내기 전 변호사 등록마저 취소한 것도 그의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사시 동기인 노무현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8인회’의 멤버였고 2004년 탄핵사건 때는 노 대통령을 변호했다. 이런 배경 탓인지 현 정부 들어 국정원장이나 민정수석 등의 제안이 왔지만, ‘친구 덕에 관직을 얻기 싫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절했다.

2004년 7월 그의 삼성행(行)도 뜻밖이었다. 에버랜드 사건으로 기소된 허태학·박노빈 전 에버랜드 사장의 변호를 맡은 뒤 삼성 쪽에서 적극적으로 ‘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에 가서는 “에버랜드 사건이 탈세는 아니지만, 절세(節稅)인 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 삼성그룹의 ‘8000억원 사회 헌납’을 관철시켰다. 이 실장의 전격 사퇴가 자괴심을 참지 못하는 그의 개인적 성격 탓인지, 아니면 사태를 수습하려는 삼성그룹 차원의 결정인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