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현상은 때론 인간을 두렵게 한다. 농경과 어로사회에서 이어져 온 갖가지 토속신앙과 풍습은 그러한 두려움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조선 사회에서 자연현상과 천재지변을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바로 왕들이었다. 당시에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임금이 부덕하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른바 ‘재이(災異)’론이다. 그런데 이 견고한 이념에 찬물을 끼얹은 사나이가 있었으니, 바로 ‘연산군의 간신’으로 알려진 임사홍(1445~1506)이다.
조선 성종 즉위 말년인 1494년. 경연청에서는 가뭄 대책을 논하는 신료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경연관 성현(1439~1504)은 “왕이 두려워하고 자성하며, 친히 비를 비는 천제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신료들도 성현과 한뜻이었고, 임금 또한 그 뜻을 가납했다. 그런데 이때 도승지 임사홍이 거침없이 내뱉는다.
“재해가 어찌 군주만의 책임이겠습니까? 주상을 바로 보필치 못한 재상들의 죄를 먼저 물어야 하옵니다.”
임사홍의 폭탄 발언에 경연청은 뒤집어졌다. 성현이 제동을 걸고 나섰지만, 임사홍은 재이론을 반박했다. 임사홍과 성현의 긴 설전은 결국 성종의 “임사홍을 삭출하라!”는 명으로 매듭되었다. 그때 경연청 구석에서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 광경을 쳐다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문제의 임금 연산이었다.
곧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또 봄 가뭄이 들어 백성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성현 등은 어김없이 재이론을 들먹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비가 내리고 아니 내리고는 하늘의 변화이지 어찌 군주의 탓인가?”라며, 오히려 유배 중이던 임사홍을 불러들인다. 임사홍을 내치라는 신료들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던 연산군 3년 6월 어느 날, 선정전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 왕조개창 이래 최대 변괴였다. 이때만큼은 문제 임금도 두려움을 느꼈던지, 마지못해 임사홍을 삭출케 한다. 조정의 팽팽한 대립이 선정전 기둥에 떨어진 벼락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뒤인 연산군 9년 2월.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너무 잦다’고 신하들이 질책하자 연산은 경연을 아예 닫아버렸다. 조선왕조의 전통을 하루아침에 밟아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날 연산은 임사홍을 병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한다. 이에 성현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연산의 폭정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이듬해인 1504년(갑자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임사홍의 계책으로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의 연루자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피의 축제를 벌인다. 성현의 시체는 부관참시 되었다. 연산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독재왕국도 영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1506년 가을. 절대 권력의 화신 연산은 반정세력에 등 떠밀려 임사홍을 앞세우고 저승길로 향하게 된다.
천재지변은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라던 임사홍과 연산.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허위 이데올로기를 타파한 선각자들일까? 더불어 성종 임금이나 성현처럼 재이론을 신봉하던 이들은 미신적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성종은 일찍이 말했다. “군주는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므로, 정사가 올바르지 않으면 힐책을 받는다. 그럴 때는 신하들에게 비판을 구해 하늘이 감응토록 하되, 신하들이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용납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부왕의 가르침에 연산은 “재해는 단순한 자연현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성종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허나 재이를 부정하면 군주가 천명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격이니, 그러면 왕권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을 것이냐?”
재이론이란 왕이 천명을 받은 대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관점이었다. 하지만 임사홍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연산은 재이론을 저급한 수준의 자연과학적 관점으로 보았다. 견제 없는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이 그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오늘날 환경재앙이 인류의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지구촌 최대 위기인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화석연료를 채취, 보급함으로써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는 이들이야말로 ‘재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