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를 뜻하는 영어인 캔디데이트(candidate)는 ‘흰색’을 뜻하는 라틴어 ‘칸디다’(candida)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에서 공직에 나서고 싶은 사람은 흰색 토가(천을 몸에 휘감는 고대 로마 의상)를 입고 대중의 신망을 얻고자 했는데, 이때 흰색은 속임수와 변절 없이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지조와 순결을 뜻했다고 한다. ‘후보’를 직역하면 ‘흰 옷 입은 사람’, 의역하면 ‘솔직한 사람’쯤 되는 셈이다.

대중을 상대로 구애하는 후보들은 어떻게든 진실한 인상을 주고 싶을 것이다. 1896년 미국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던 브라이언은 토가의 전통을 이어 하얀 옷차림으로 유세를 했고,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한나라당 경선 날 박근혜 예비후보가 입은 옷도 하얀색 정장이었다.

로마의 시인 페르시우스가 당시 후보들을 ‘회칠한 야망’이라고 비꼬았듯, 옷 하나 바꿔 걸친다고 갑자기 사람이 솔직해질 리는 없다. 요즘 같은 미디어 선거가 없던 시절이니 이미지 조작을 위해 홍보전문가가 조언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 로마 시민들이 후보들을 쉽게 알아보게 하려는 식별의 의미가 더 크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대선이 55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당의 후보경선이 마무리되어 그 많던 후보들이 다소 정돈되었지만, 우리 대선 무대는 여전히 시야가 어지럽다. 노선이나 지향점이 식별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내세운 공약을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언론사마다 ‘의미 있는 후보’와 ‘의미 없는 후보’를 나누어 다루고, 그 숫자와 기준이 제각각이어서도 아니다. 4명이든, 6명이든, 유권자가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후보들의 정보는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하다. 군소후보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숫자는 민주주의의 값이요, 무게이며 축복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모두 선관위에 이름을 올린 진짜 후보들이다.

물론 현재 거론되는 후보들이 투표일까지 그대로 갈 것으로 믿는 국민은 없다. 우선 상당수가 선거기탁금을 내는 시점을 기해 대선판을 떠날 것이고, 나머지 후보들도 어떻게 이합집산해서 어떤 ‘트랜스포머’(‘변신로봇’을 뜻하는 SF용어)를 탄생시킬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형태가 바뀌어도 재료가 진짜이니 진짜 후보라고 해야 한다.

정작 대선 경기를 방해하는 건, 후보도 아닌 거물급 정치인들이 후보인 양 행세하며 진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다. 정식 후보가 아니니 ‘가짜 후보’로밖에 부를 수 없는 이들의 형상도 다양하다. 우선 본인은 출마의 뜻이 없다는데도 일부 추종자의 지지가 강해 트랙을 떠나지 못하는 ‘지지자 추대형’이 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의 말과 대변인의 말이 종종 어긋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가 하면 훈수가 지나쳐서 선거운동으로 오해받는 ‘훈수형’도 있다. 그 정도로 파워 있는 훈수를 하려면 역시 노벨상 수상 정도의 경력은 갖춰야 한다.

아마도 가짜 후보의 백미는 현직 대통령이면서 후보에 준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대통령 겸임 후보’일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면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수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설파하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통령이기에 초청된 자리에서 후보나 할 법한 말을 하는 것은 엄연히 계약 위반이며, 직권 남용은 아닐지라도 직권 오용에 해당한다. 대선이라는 경기에서 ‘힘없는 진짜 후보’는 나름대로 의미라도 찾을 수 있으나, 게임의 공정성을 해치고 정치 도의를 무너뜨리는 ‘힘센 가짜’들은 퇴장해야 마땅하다.

누가 뭐래도 2007년 대선은 ‘진짜 후보’들이 실력과 명분을 겨루는 자리다. 그들이 최선을 경주할 수 있도록 정식 후보가 아닌 사람들은 트랙을 비켜주는 것이 옳다. 그래서 굳이 후보들에게 흰 옷을 입히지 않아도 국민들이 헷갈리지 않고, 선수들의 비전과 기량을 맘껏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