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군인들이 학교로 들이닥쳤어요. 몇몇 여학생들을 끌고 가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했습니다. 저 역시 교실 안에서 4명의 군인에게 당했어요. 그들은 ‘우리 흑인 모두를 보살필 것이며, 선의를 위해 다르푸르를 청소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아프리카 수단의 서부 다르푸르(Darfur) 지역에서는 이것이 ‘일상(日常)’이다.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Amnesty)에 따르면 지난 2003년 2월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수단에서 수단해방군(The Sudanese Liberation Army·SLA)이 이슬람계 정부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이래 다르푸르에서는 수 천명의 토착민 여성과 소녀들이 성폭행을 당했다. 유엔(UN) 조사 결과, 수단 이슬람계 정부가 투입한 이슬람계 민병대 ‘잔자위드(Janjaweed)’의 학살로 지금까지 다르푸르 주민 20만~30만명이 목숨을 잃고, 2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주선으로 지난해 5월 수단 정부와 최대 반군 조직인 수단해방군(SLA) ‘미니 민나위(Mini Minawi)’ 그룹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일부 반군이 협정을 거부하고, 정부도 이행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양측은 다시 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르푸르 내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수단 내전의 역사… 인종·종교·경제적 이유가 뒤얽힌 비극
195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수단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11배가 넘는 넓은 땅이다. 석유, 우라늄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그러나 계속되는 내전으로 자원을 제대로 활용도 못한 채 세계 극빈 국가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수단 내전의 첫째 이유는 인종과 종교 문제다. 수단은 독립 이후 인구(약 3910만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이슬람계가 줄곧 정권을 잡았다. 국토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아프리카연합(AU)의 회원국인 수단이 중동 지역의 나라들이 주축이 된 아랍연맹에 가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세기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수단 이주는 토착민들을 소수인종으로 전락시키고, 이슬람을 주류로 만들었다.
대신 기독교 및 아프리카 토속 종교를 믿는 나머지 30% 국민은 이슬람계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현(現) 수단 대통령 알 바시르도 1989년 이슬람계 지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수단을 궁핍으로 몰고 간 내전의 또 다른 원인으로 경제 문제를 꼽기도 한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기후 변화로 수단 남부에서는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다.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수단 남부의 강수량은 40% 이상 줄었다. 과거 남부지역에서 식수와 식량이 넉넉했을 때 남부 토착 농민들은 북부 이슬람계 사람들이 가축을 몰고 와 물과 풀을 먹이는 일을 너그럽게 봐줬다. 하지만 가뭄이 심해지자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남부 농민들은 북부 이슬람계가 식수와 곡물을 축낸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정권이 남부 토착민에 대해 불평등한 차별 대우를 감행하고, 1983년 정부가 기독교도가 상대적으로 많은 남부지역에 이슬람 율법에 의한 생활을 강요하자, 남부 토착민들은 독립을 주장하며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창설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단은 계속된 내전상태에 들어가게 됐다. 수단정부는 1992년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반군토벌작전에 들어갔고 이후 반군 활동은 급격히 위축됐다. 이후 1998년 우간다의 반군 지원으로 수단 사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족의 집’에서 푸르족 인종학살… 200만명 이상 난민 사막에서 떠돌아
‘다르푸르’라는 말은 아랍어로 ‘푸르족의 집’이란 뜻이다. 푸르족은 이슬람 민족과 흑인 토착민의 혼혈로 다르푸르에는 푸르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는 다르푸르 지역을 통치하면서 푸르족을 탄압했고, 푸르족은 차별을 못 견디겠다며 저항했다. 2003년 2월 푸르족으로 구성된 수단해방군(SLA)은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의 대가는 ‘잔자위드’의 처절한 보복이었다. 인종 학살이 대부분 인종과 종교가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지만 다르푸르는 달랐다. 푸르족이 이슬람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잔자위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족을 살해했다. 반군도 잔자위드에 거세게 저항하면서, 다르푸르는 양측이 밀고 밀리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 와중에 주민 20만~30만명이 죽고 250여만명이 갈 곳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다르푸르 비극의 정점은 난민촌이다. 250만명의 난민 중 4만8000명만이 3곳의 난민 수용소에 수용됐을 뿐 나머지는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는 척박한 수단·차드의 국경지대를 떠돌며 기아와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사회가 다르푸르 사태가 벌어진 지 1년 동안 무관심했던 것도 인명 피해를 키우고 말았다. 2004년 아프리카 연합(AU) 평화유지군이 다르푸르에 파병되면서 평화협상이 시작됐지만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 결정은 2006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까지 수단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 2005년 UN은 수단에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했지만, 전체 석유 수입량의 10%를 수단에서 가져오는 중국이 거부권 행사 의사를 밝혀 무산되기도 했다.
◆ 다가오는 평화협상… 사태 해결은 미지수
오는 27일 UN과 아프리카 연합군의 중재로 리비아에서 수단 정부와 반군 조직이 평화협상을 하기로 했지만, 유혈사태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난달 29일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세력이 다르푸르에 파견된 아프리카 연합군 기지를 공격해 아프리카 연합군 10여명의 목숨을 빼앗고 총과 트럭 등을 약탈해 갔다. 사건 발생 후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방에게 화살을 돌렸다. 수단 정부 측은 정부군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주요 반군 조직의 하나인 정의평등운동(JEM)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JEM은 공격사실을 부인했다.
지난 8일(현지시각)에는 아예 아프리카 연합군 기지가 있는 하스카니타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는 BBC보도가 있었다. 유엔임무단(UNMIS)이 지난 6일 현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하스카니타 마을은 일부 사원과 학교를 제외하고 완전히 불탔으며, 100여명의 주민이 숨지고 7000여명의 주민들 대다수가 근처 숲속으로 달아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 소행인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BBC는 정부군과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있는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가 지난 3일부터 아프리카 연합군(AU) 피습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하스카니타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장악한 마을에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정부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수단 정부가 평화유지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방치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올해 1월 취임 이후 다르푸르 사태를 ‘UN의 3대 과제’ 중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로 꼽았다. 반 총장은 지난달 5일 직접 다르푸르 난민촌을 방문하기도 했다. 반 총장은 일부 언론과 인터뷰에서 “현장의 비참함을 직접 눈으로 보니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며 “다르푸르 사태가 기후 변화에 따른 물 부족에서 기인한 점이 있는 만큼 유엔 차원에서 수자원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7월 반 총장 주도로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 결의안이 통과됐으며, 계획대로라면 10월부터 유엔 평화유지군 2만6000명이 다르푸르에 주둔하게 된다. 하지만 현지 구호단체들은 잇따라 발생하는 내전 상황에 지원계획을 철회하는 국가가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구도단체 직원들에 대한 공격도 늘었다. 세계식량계획 관계자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올해 무장세력에 당한 사건만 77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지난 3일 다르푸르의 한 마을을 찾았지만 수단 보안군의 제지를 받았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현지주민들은 이들과의 접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