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한 예술', 고대 이집트 미술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믿었다. 즉, 생명의 힘은 영원하다는 '영혼불멸(靈魂不滅)'사상을 믿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육신을 떠나지만 곧 되돌아온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육신은 신성한 영혼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인간이란 물질적인 육신과 생명에너지인 영혼인 '카(Ka)'와 인간의 영원하고 소멸치 않는 정수(精髓)인 '바(Ba)'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지상에서 누렸던 부귀와 권세, 행복을 죽은 다음에도 변함없이 누리고 싶었던 고대 이집트 왕족들은 죽은 후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피라미드(Pyramid)와 미라(Mummy),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이 모두가 죽은 자가 영원한 삶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기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살아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을 준비하는데 썼다.

이집트 미술을 ‘죽은 자를 위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렇게 한결같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고대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와 그들의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썩지 않게 만든 미라, 그리고 피라미드 속의 벽화를 보면 이집트인들의 내세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이 모두 통치자인 파라오(Pharaoh)를 위한 것들이지만 영원한 생명과 죽은 후의 부활을 믿었던 이집트인들 대부분의 보편적인 내세관의 표출이다.

불멸의 존재를 꿈꾸며…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다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사람을 그릴 때 눈과 어깨와 몸통은 정면을 향해 있고, 머리와 팔, 다리는 측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표현한 점과 등장인물들의 크기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왕과 왕비에서부터 제사장, 관리, 신하, 평민, 노예까지 그 차이가 엄청날 정도로 중요도에 따라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나 왕족처럼 신분이 높은 계층은 거인처럼 크게 표현했으며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난쟁이처럼 작게 그렸다.

고대 이집트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 계급사회였다. 게다가 그 계급은 출생 때부터 정해져 세습되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파라오의 혈통을 가진 자만이 파라오가 될 수 있었고, 재상의 가문에서는 재상이,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배출되었다. 평민과 노예계급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이 되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신분 계급에 대한 불만은 없었던 것 같다. 신분간의 갈등이나 혁명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여 자신에게 정해진 신분의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서로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 이유는 현생에서의 삶의 행복이 죽어서도 영원히 계속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시간은 짧지만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관(死後觀)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가 있다. ‘이집트 사자의 서’는 피라미드에 미라와 함께 매장한 파피루스나 가죽에 쓰여 진 두루마리, 피라미드 벽면에 새겨진 비문으로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심판관 오시리스(Osiris) 신(神)과 42명의 배심원 앞에서 42개의 죄에 대해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 보여야 내세 즉 오시리스의 왕국으로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재판과정은 이러하다. 우선 양심을 상징하는 죽은 이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게 된다. 죽은 자의 심장이 반대편 저울의 진실을 상징하는 깃털보다 무거우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심장이 깃털보다 가볍거나 그 무게가 같다면, 죽은 이는 오시리스신과 배심원들에게 42개의 죄에 대해 하나하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는 부모님께 효도했습니다. 나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등등이다. 맨 마지막에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장면은 서구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심판’에서 보이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