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은 말 그대로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곧바로 세계관을 묻지는 않지만, 거의 모든 문제에는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계화, 정보화, 생명공학, 인식론, 역사 등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은 논술의 바탕이다. 독해력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자기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최근 자주 출제되는 생태계나 빈곤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세계를 기계처럼 질서정연한 것으로 보는 기계론에 따르면, 자연이나 인간사회는 잘 조립된 기계다. 따라서 세계는 숫자나 기호로 환원하여 과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이 계산을 근거로 필요한 부분은 이용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면 그만이다. 이용하고 빈 곳은 다른 걸로 메우면 된다.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건강한 인류사회를 병들게 하는 존재이므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철저하게 효율성 또는 공리적 논리가 작용한다. 반면, 모든 것이 연관을 맺고 있다는 유기체적 세계관은 다르다. 자연의 일부분은 전체 자연과, 인류의 일부분은 전체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무엇 하나라도 훼손되면 전체가 위태롭다. 따라서 빈곤을 돕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킨다’(나비효과)는 카오스 이론 역시 유기체론을 뒷받침한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무엇과 연관을 맺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예측불허다.

플라톤의 동굴이야기와 단군신화

동서양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두 이야기를 교과서로 살펴보자. 물론,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이 이렇게 딱 구분되지는 않는다. ‘전통윤리’에서는 서양의 사상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곧장 비판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동양중심주의다.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도 있는 법이고, 주류라고 해서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동굴이야기는 세계를 동굴 속과 동굴 밖, 곧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이데아)로 나눈다.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빛에 반사된 그림자로서 허구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허구를 진짜로 안다. 이처럼 서양의 주류 세계관은 이데아와 현실을 구분하는 이원론(二元論)이다. 이데아는 절대불변의 완전한 세계고, 현실은 늘 변화하는 불완전한 세계다. 따라서 불완전한 현실에서 벗어나 완전한 이데아를 향하는 것이 삶과 정치의 목표가 된다. 이 이원론은 천상/지상, 영혼/육체, 이성/욕망을 나누고 앞에 것을 지향한다. 나아가 이원론은 인간/자연, 남성/여성, 서구/비서구로 나누기에 이른다. 따라서 동굴이야기는 오늘날 인간중심주의의 기원 구실을 한다.

▲ 강세황, 벽오청서도(윤리와 사상)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한 구석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 여기서 자연에 의지하여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본다.

단군신화는 ‘문학’에 빠짐없이 실려 있고, 7차 ‘국사’에서도 실었다. ‘국사’에서는 신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지만, 오히려 우리의 세계관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환웅이 하늘에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땅으로 내려와서 곰이 변신한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바람과 비와 구름이 뒤섞이고, 신과 인간, 나아가 동물까지도 어울리는 광경을 본다. 이렇게 모든 우주만물이 뒤엉켜 하나를 이룬다는 일원론(一元論) 또는 유기체론에서는 인간중심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의 생태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한 가지만 짚자. 유기체론을 전체론(holism)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전체주의(totalism 또는 totalitarianism)가 아니다. 전체주의가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데 반해, 전체론은 개체의 독립성을 전제로 한다. 독립된 개체들이 무한대로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론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는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세계관과 삶

제1강 ‘나는 나인가’에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보았다. 한 생명의 탄생에 우주만물이 어울리고, 나아가 나도 거든다. 이것이 곧 일원론 또는 유기체적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세계를 계산하고 이용한다는 기계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세계관이 삶에 반영된 것이 윤리학자 싱어가 제안한 ‘하노이의 탑’이다.

이 그림은 유기체적 세계관의 적용 범위를 잘 보여준다. 유기체론은 개인과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와 국가를 중심으로 보는 발상조차 뛰어넘는다. 세계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가 중심적인 발상은 배타적 민족주의로 귀결되어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고 이윽고는 우리의 평화마저 위협한다. 문화권 중심주의는 동서 문명의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다. 나아가 세계시민주의도 인간만을 중시하는 한, 생태계 파괴를 낳아 인류를 멸종의 위기로 내몬다.

세계의 모든 존재를 위한다는 전체론(holism)적인 발상은, 언뜻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다. 이 발상의 참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모든 생명, 나아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위하는 것은, 곧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다.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구제하는 일이나 종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 나아가 남극과 북극의 빙하를 지키는 일은 인류의 생존을 지키는 일이다. 따라서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인간 생명의 유지가 가장 큰 도덕이라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지키는 것 또한 도덕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은 가장 크게 열린 윤리관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