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는 울산의 토성(土姓) 아홉 가지를 꼽는데, 그 대표격은 울산 박씨와 학성 이씨다. 울산 박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박윤웅이고, 학성 이씨의 시조는 조선초의 명 외교관인 이예이다. 특히, 한 성씨가 대대로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세거(世居)라고 하는데, 울산을 대표하는 세거마을(집성촌)로는 북구 송정동 송정마을(밀양 박씨), 웅촌면 석천리 돌내마을(학성 이씨), 범서읍 사연리 사일마을(달성 서씨), 상북면 명촌리 명촌마을(경주 김씨)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송정마을은 울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전해져 왔다. 울산비행장과는 국도7호선과 동해남부선 선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구시가지에서는 약 9㎞ 거리인데,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이 경주에서 흘러내려서 동대산을 이루고, 여기에서 서쪽 동천강 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구릉 남사면에 큰각단, 새각단, 달내끝 같은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과 구릉사이에는 넓은 전답이 자리 잡았다.
송정마을 중 새각단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박상진 의사 생가가 있고, 이 마을 남쪽 큰각단에 밀양 박씨 하계공파의 종택과 별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송정문중의 시조인 괴천공 박창우가 1663년에 영천에서 이주해 오면서부터이다. 괴천공의 울산 이주는 울산최초의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인 구강서원건립을 위한 준비작업의 결실이다. 특히, 경주와 영천에 학맥과 지연이 닿아 있는 박창우로서는 경주와 가까운 이곳이 터를 잡기에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울산 이주 후 박창우는 향교 교임으로 추대되어 향교의례 절목을 만들고, 구강서원 창건의 고문역할을 맡았다. 서원 위패봉안 때는 경주와 영천의 선비를 대거 참석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자제들도 대를 이어 서원의 주요직책을 담당하였고, 학성 이씨, 파평 윤씨, 고령 김씨 집안 같은 울산의 명문가들과 혼맥을 형성하여 유력한 향반(鄕班)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유서 깊은 송정마을도 현재 추진 중인 송정지구 개발로 사라질 운명이다. 그나마 밀양 박씨 송정문중 정각인 봉산정사와 종택의 별당 같은 고 건축물은 사업지구내의 공원부지에 이전해서 보존할 것이라 하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