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7일 오후 3시, 조용하던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체조장이 분주해졌다. 제40회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몇 주간 이곳을 비웠던 한국 남자 기계체조 대표팀이 이날부터 훈련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8년 만에 김대은(전남도청) 선수가 평행봉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 단체 종합 5위의 성적으로 2008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9월 12일 귀국, 닷새간의 휴식 끝에 16일 선수촌으로 복귀한 선수들은 가벼운 몸 풀기로 훈련을 시작했다. 한가운데 마루운동 연습장을 기준으로 오른편이 남자 선수들의 공간. 평행봉과 링, 마루, 안마 등 각종 기구 사이에서 선수들은 각자 주력 종목을 중심으로 서서히 훈련 강도를 높여갔다. 평행봉에서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하는 김대은(23) 선수의 모습도 보였다.
30분쯤 흘렀을까, 이주형 감독이 소위 ‘1진(세계대회에서 엔트리 넘버로 활동하는 선수)’ 7명을 마루 연습장으로 불러 모았다. 가로·세로 각각 12m의 정사각형 공간을 내달리며 공중 회전하는 동작의 연습이 시작됐다. 두 파트로 나뉜 선수들은 대각선 방향으로 쉴 새 없이 회전하고 또 회전했다. “배를 좀 더 내밀고, 시선은 앞으로 향해야지! 몸이 일자가 되도록, 다시!” 이 감독은 선수 한 명 한 명의 동작을 관찰한 후, 자세를 교정했다. 모서리마다 배치된 코치들도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음 金은 베이징 올림픽”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의 선전을 계기로 한국 남자체조팀은 한껏 고무돼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6회 연속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을 뿐 아니라 김대은 선수의 금메달 획득으로 아직 이루지 못한 염원인 ‘체조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올 1월부터 남자체조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이주형(34) 감독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체조계를 주름잡았던 간판급 선수 출신이다. 그는 1999년 중국 톈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평행봉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호주 시드니올림픽에서 평행봉 은메달, 철봉 동메달을 거푸 따내며 한국 팀이 단체 종합 7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도마를 제외하곤 번번이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던 한국 남자체조의 주력종목 리스트에 평행봉을 추가한 선수 역시 그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김대은 선수의 이번 입상을 놓고 ‘평행봉은 다른 종목에 비해 근력이 많이 요구되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이 특히 강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감독은 이를 부정한다. “체조에서는 두 명의 심판이 경기 점수를 매깁니다. A심판은 선수의 기술을 정확하게 구별해 난이도가 높은 10개의 종목을 골라 ‘시작 점수(스타트 밸류·start value)’를 매기고 B심판은 각 단계에서 선수가 보여준 연기를 감점해 나갑니다. 시작 점수에서 감점 부분을 뺀 것이 총점이 되는 거죠.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평행봉도 10가지 기술을 모두 일정 난이도 이상으로 하려면 어마어마한 체력이 듭니다. 적은 근력으로도 평행봉을 잘할 수 있다는 건 틀린 말이에요. 체력이 우선이죠.”
스포츠의학 전문의인 조성연 하늘스포츠의학클리닉 원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선수단의 팀 닥터로 현지에 합류했다. 당시 판정 시비로 개인 종합 부문에서 동메달에 머물렀던 양태영 선수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몇 년째 김대은 선수 주치의로 치료와 상담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보는 한국 남자체조의 현주소는 어떨까?
“우리 체조선수들의 체격 요건은 분명 몇 년 새 놀랄 만큼 좋아졌습니다. 타고난 조건이 훌륭한 점도 있지만 전문 영양사에 의한 영양 공급, 스포츠의학에 기반을 둔 재활 트레이닝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면도 간과할 수 없지요. 선수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선수촌 식단은 영양 공급 면에서 굉장히 균형 잡혀 있어요. 특히 체조는 젖산을 빨리 분해해 줄 수 있는 철분과 운동 후 혈액 순환에 도움을 주는 항산화제, 과도한 운동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마그네슘 등의 보충이 중요한데 최근에는 이런 부분이 스포츠 영양제나 주사요법 등으로 잘 보충되고 있습니다.”
조 원장에 따르면 스포츠의학적 측면에서 체조는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체중(weight)을 조절해야 하는 운동이다. 체중은 체조선수에게 필수적인 회전력과 관련되며 자신의 체중에 비례하는 회전력을 갖추고 이를 잘 조절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 둘째, 다른 종목에 비해 무게중심의 비중이 큰 운동이다. 김대은 선수가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회전 후 착지할 때 무게중심을 잘 잡아 안정된 착지 동작을 보여준 덕분이라는 게 그의 설명. 셋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정한 신장(키)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대부분의 체조 선수들이 자그마한 체구를 갖고 있는 것도 마루나 링, 평행봉 등 대부분의 종목 연기를 원활하게 하기에 크지 않은 신장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대은 선수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체형을 지녔다’는 게 조 원장의 평가다. “기계체조선수들은 대개 상체가 굉장히 발달한 대신 하체가 부실한 편입니다. 그런데 김 선수는 한 번도 하체를 치료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하체가 탄탄하고 강해요. 특히 발목 인대조직이 강하기 때문에 여러 번 회전하고 나서도 착지했을 때 뛰어난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요.”
스포츠의학 전문가들은 최근 우리 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평행봉 부문에 강세를 보이는 이유를 한국인의 체형적 특성에서 찾는다. “평행봉에서 가장 중요한 게 팔 길이입니다. 무게중심의 원리로 따지면 체조선수의 손끝이 작용점인데 이 작용점의 길이가 길수록 스포츠역학에서는 불리하다고 봅니다. 외국 선수의 경우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팔이 길기 때문에 작용점과 중심축 간 거리가 늘어나 불안정해지고 결과적으로 많은 힘을 써야 하죠. 우리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팔이 짧지만 어깨 넓이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어떤 동작을 할 때 다리를 모으는 것보다 벌리는 게 더욱 효과적입니다. 맨손체조를 할 때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는 것도 같은 논리지요. 평행봉에서는 다리 넓이에 해당하는 게 어깨 넓이예요. 우리 선수들은 서양 선수와 어깨 넓이는 비슷하고 그것을 지지해주는 팔 길이가 짧으니 이중으로 유리한 겁니다.” (조성연 원장)
어깨 넓고 팔 짧은 체형 유리
한윤수 경북대 체육교육학과 교수(대한체조협회 기술위원)의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체조를 할 때 키가 크면 동작이 시원해 보이기 때문에 미적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평행봉의 경우, 봉 높이가 제한돼 있어 무조건 큰 키가 유리한 건 아니에요. 봉에 매달린 상태에서 대부분의 기술이 이뤄지기 때문에 오히려 키가 작은 사람이 유리할 수 있지요. 일례로 김대은 선수가 구사하는 F난이도 기술 ‘매달려 무릎 펴서 뒤로 두 바퀴 돌아 팔로 걸치기’의 경우 키가 크면 바닥에 발이 끌릴 수 있어요. 바닥에 신체가 닿는 것은 치명적인 감점 요인(0.3점)이거든요.”
그러나 체격 요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선수 개개인의 지독한 연습과 노력, 그리고 강한 의지다. 조 원장은 “고강도 훈련이 거듭되기 때문에 손목과 팔꿈치, 어깨 등 동일 부위의 부상이 잦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수들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특히 김대은 선수는 ‘연습 벌레’로 유명하죠. 체조는 아주 짧은 순간에 발생하는 기술로 평가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날그날의 컨디션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정신력이 경기를 좌우합니다. 양궁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선수들은 웬만큼 아파서는 티를 내지 않고 끝까지 꿋꿋하게 훈련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한국인 특유의 질긴 근성이 오늘날의 기량 향상을 낳은 셈이지요”라고 평가했다. 이주형 감독 역시 “체조는 단 하루라도 훈련을 쉬면 금세 그 결과가 나타나는 운동”이라며 “매일 일정 시간을 투자해 자신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하나의 새로운 기술을 완전히 익히려면 적어도 1년은 투자해야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