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과 히틀러의 공통점
기원전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던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은 기존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철권통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진시황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가(儒家)학자들을 생매장하고 관련 서적들을 모두 불태운,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일으켰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예는 20세기에서도 발견된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통치한 독일 나치제국에서도 중세의 ‘마녀재판’과도 같은 학문과 예술에 대한 탄압 사건이 있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대 진학에는 실패한 패배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현이었을까? 스스로를 ‘예술의 보호자’라고 여겼던 히틀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치 선전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1933년 이른바 ‘자유와 월권행위에 반대하고, 불멸의 독일 정신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위하여’라는 모토를 내세워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등의 사상가 131명의 책 2만 여권을 소각해버린 ‘현대판 분서갱유’사건이 일어났다.
독재정치의 예술탄압, 자유로운 순수 예술가들의 수난
히틀러는 '확고한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규정짓고 나치의 정치적 사상을 표방하는 예술을 지지하였다. 히틀러의 파시즘을 대변하고 나치즘에 봉사하는 예술 활동만을 인정했다. 여기서 개인적 감정을 담아내는 순수예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나치는 인종차별주의에 바탕을 둬 독일 게르만 민족의 인종적 우수성을 찬양하고 전쟁의 승리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예술만을 진정한 예술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나치의 정치적 의도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제작되는 작품만이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었다.
또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주의와 추상 미술을 ‘퇴폐미술’로 간주해 피카소를 비롯한 112명의 예술가를 퇴폐미술가로 지정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작품 1만 7000여 점을 압수하여 경매를 통해 팔아 넘기거나 그 중 5000점 이상을 불태워버리는 등 예술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피카소뿐만 아니라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브라크, 샤갈, 미로, 클레, 뭉크 등 지금은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화가 대부분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실험적인 시도로 한창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다. 많은 독일화가들은 나치의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을 했는데,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무려 639점이나 되는 작품을 나치에게 압수당하자 신경쇠약에 걸려 스위스의 요양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예술의 홀로코스트, ‘퇴폐미술전’
나치가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예술을 이용한 예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1937년 7월 18일에 개막한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바로 다음날 열린 ‘퇴폐미술전’이었다. 이 두 개의 전시는 히틀러라는 개인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함께 편집광적이고 편협한 그의 예술취향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나치는 그리스 고전주의 미술을 모범으로 한, 건장한 전사 같은 아리안족의 남성상과 풍만한 육체와 따스한 품성을 지닌 여성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만을 전시한 ‘위대한 독일미술전’을 열었고, 바로 그 다음날 현대미술을 탄압하기 위해 의도적이고도 노골적인 경멸감을 담아 ‘퇴폐미술전’을 열었다. ‘퇴폐미술전’은 마치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 좁은 복도에 다닥다닥 그림들을 붙여 걸었고, 그림을 비추는 조명도 형편없었다.
그림은 액자도 없이 걸렸으며, 심지어 바닥에 마구 세워놓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정신병자들의 그림을 걸어놓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이 전시는 국민을 계몽시킨다는 명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약 200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 계몽’이라는 나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히틀러가 나치 미술가로 찬양했던 화가들의 이름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퇴폐미술전’에 작품이 전시되었던 화가들은 무척 유명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