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여름 동해안 바닷가를 찾은 구원이의 모습. 후원자인 가수 이광필씨에게 최근 메일로 보낸 사진이다.

선천성 사지절단증으로 팔다리 없이 태어나 몸통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오토다케’ 이구원(18)군. 12년 전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바람 빠진 축구공을 입에 물고 다니면서도 늘 밝게 생활하는 여섯 살 구원이의 모습이 방송되자 시청자들은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서 삶의 의미, 희망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구원이가 아홉 살 때는 ‘오체불만족’이란 자서전을 쓴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乙武洋匡)와 만나는 장면이 다큐멘터리로 방송되기도 했다. 그리고 8년. 구원이의 이야기는 차츰 잊혀졌다.

지난 8월 말 구원이가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여년 동안 구원이의 후원자가 되어준 가수 이광필(42)씨를 통해서다. 올 11월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구원이는 어엿한 수험생이다. 만남은 쉽지 않았다. 십수 년 동안 구원이와 함께 생활하며 그의 손과 발이 되어준 수녀님은 ‘나중에…’를 연발하며 극구 만류했다. “공부하느라 바쁘고, 매스컴에 자꾸 나오는 게 구원이의 영성에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 같고….”

지난 9월 17일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장대리 '구원의 집'을 찾았다. 구원이에게 인사만 하고 가기로 했다. 성(聖)황석두 루가전교수도회가 운영하는 구원이의 보금자리는 읍사무소 뒤쪽에 있는 연주황색 3층 건물이다. 어릴 적부터 수도회에 맡겨져 인근 성산리에서 생활해온 구원이는 2~3년 전부터 이곳 장대리 '구원의 집'에서 살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간단한 예배단이 마련된 마루를 지나 왼쪽 끝이 구원이의 방이다. 마루에는 작은 앉은뱅이 밥상과 등받이 의자, 나무로 만든 휠체어가 보였다. 모두 '구원이 전용(專用)'이다.

방에 비스듬히 누운 구원이는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연필을 입에 물고 사회탐구영역 자습서의 책장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어, 누구세요?” 뺨으로 책장을 스윽 넘기던 구원이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잠깐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밝은 미소로 맞았다. 감색 티셔츠에 검정색 반바지 차림.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에 거뭇거뭇 수염이 난 얼굴은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었다. 변성기를 지나 목소리도 한층 굵어졌다. 몸무게를 묻자 “38㎏인데요” 하더니 “키는 1m 조금 넘을까요?” 하면서 씨익 웃는다. 덩치가 커지고 머리도 굵어졌지만 해맑은 표정은 소년시절 그것과 똑같았다. 양쪽에 열린 창문으로 청량한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성모상 앞에 앉은 어릴 적 구원이. (왼쪽) /사진=이광필<br> 8년 전 오토다케(오른쪽)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구원이.

창문 아래 책꽂이에는 수능 참고서와 문제지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어림잡아 누워 있는 구원이 키의 세 배는 돼 보였다.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 둘레에 잇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책을 꺼내 펴 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입으로 물어서 하는 수밖에요.” 대충 보다 만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처음부터 맨 마지막 장까지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읽은 흔적이 선명했다. 구원이는 지금 공부하는 사회탐구 과목이 가장 좋다고 했다. 수학 문제지에는 구원이만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시가 적혀 있었다. ‘입으로 연필을 물고 수학 문제 계산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하고 묻자 “남들처럼 속도가 안 나서 그렇지 계산은 다 해요”라고 말했다.

구원이는 하루 대부분 시간을 누워서 보낸다. 식사는 물론 용변 처리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혼자 힘으로 굴러다닐 수는 있지만 똑바로 일어날 수는 없다. 일어나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은 하루 2시간 안팎. 식사와 예배를 볼 때, 자원봉사 교사들의 강의를 들을 때다. 벽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과학·수학 등 과목명이 적혀 있는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개인지도 수업시간에는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이젤 위에 대형 집게로 책을 고정한 뒤 그 앞에 의자를 놓고 선생님과 마주 앉는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보는 교육방송 수능 프로그램도 구원이에겐 큰 도움이 된다.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린 구원이의 꽃 그림들. 구원이는 구족화가협회 회원이다.

지난 8월 말 구원이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60점만 넘으면 합격인데, 평균 88점을 받았다. 대입 검정고시 시험을 앞둔 7월 구원이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떨지 말고 그냥 맡겨버려 ㅋㅋㅋ, 이구원 화이팅, 아자 아자!!’ 같은 응원의 메시지가 보이더니, 합격한 뒤에는 ‘수능생 이구원, 수능 모의문제 많이 풀어보렴, 편하게 마음 먹구^^’ 같은 격려의 글이 올랐다.

막대기를 입으로 물고 자판을 한 자 한 자 두드리는 일이 쉽진 않지만, 구원이는 친한 선·후배들의 미니홈피에 시시콜콜 자신의 일상을 올리면서 세상과의 끈을 이어간다. ‘형 장대리엔 언제 오실 거에욤? 저 수능 원서 접수했어요’(9월 11일), ‘형, 졸업 추카해여(축하해요), 공부가 재밌냐고요? 아주 주글(죽을) 맛이에여’(8월 31일), ‘시내 갔다 왔어요.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보고 쇼핑도 실컷 했슴다. ㅋㅋㅋ’(6월 23일)….

다가올 수능시험 얘기를 하자 구원이의 얼굴이 조금은 상기된다. “대입 검정시험 봤지만 아직 공부량이 많지 않고…, 올해는 시험 삼아 보는 거예요. 사실 자신 없긴 한데…”라고 한다.  기상 시간을 묻자 “4시 전에는 눈을 뜬다”고 했다. 날씨도 선선하고 정신이 맑은 오전 시간을 많이 확보하자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루 세 번 드리는 예배시간을 빼놓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의 턱에는 굳은 살이 박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으로 바닥을 짚을 때 구원이는 턱으로 짚어야 하기 때문이다. “눕고 엎어져서 생활하다 보니 등과 가슴에 땀띠가 많이 나요. 머리 좀 만져보세요. 울퉁불퉁, 올록볼록하죠? 어릴 때부터 하도 굴러다녀서 그래요, 큭큭.”

책꽂이에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몇 권, 중국어 회화 교재도 보였다. 예전에는 도서 대여점에서 책을 많이 빌려 보았는데, 최근에는 검정고시와 수능 준비 때문에 많이 읽지 못한다고 했다. 구원이는 그림도 그린다.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리는 구필(口筆) 그림은 수준급이다. 2001년에는 세계 구족화가협회에도 가입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 음악을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SG워너비'. CD 가방은 그의 보물상자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변함 없이 '문근영'.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자 "예쁘잖아요" 하더니 얼굴이 발개졌다.

불편한 몸 때문에 바깥 나들이가 쉽지는 않겠다고 묻자 “도와주시는 분이 많아서 어지간한 데는 둘러봤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는 서울 63빌딩에 구경 갔어요. 청주의 웬만한 데는 가봤고. 외국이요? 캐나다에 다녀왔고 1999년에는 오토다케 형을 만나러 일본에도 갔죠.”

구원이에 앞서 선천성 사지절단의 장애를 겪은 오토다케는 “팔다리가 없어 불만이지만 인생은 대만족”이라는 희망과 의지를 갖고 인간 승리의 모범이 된, 구원이에겐 ‘멘토’ 같은 존재다.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와 방송 리포터와 교사로 활동한 그는 중요한 것은 육체의 벽이 아니라며 ‘마음의 장벽 없애기(barrier free)’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구원이는 “여름을 지나면서부터는 공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깥 출입도 어지간하면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구원이의 꿈은 무엇일까.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참 많았다”던 구원이는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심리상담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과 다른 자신의 몸을 보며 장애와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 나 혼자만 힘들게 사는 줄 알았다”는 미니홈피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사는 것 그 자체가 고행인 것 같습니다. 행복은 그 고통을 잠시 달래주는 초콜릿 정도! 그러니 너무 당신만 어려운 삶을 산다고 힘들어 하지 마세요….”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묻자 “종교나 철학, 일반 사회과학 등 사람과 세상을 알 수 있는 학문을 폭넓게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구원이의 삶과 꿈은 매달 성당 교우와 후원자들에게 전해지는 소식지 '물방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식지 중 '구원이의 집' 코너에는 그의 생각이 시(詩)나 산문 형태로 꼬박꼬박 실린다. 열네 살 소년이던 2003년 9월에 쓴 '행복'이란 시에서 구원이는 "우리 모두 장님 같이 멀리 있는 거짓 행복보다 옆에 있는 참 행복을 찾길 기도한다"고 했다.
'행복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 보이지만/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이 바로 옆에서/ 손짓하는데도/ 장님처럼 알아보지 못하고/ 권세와 돈만을/ 끝없이 얻으려 한다… // 참 행복은 사실/ 생활이 부유하고/ 어려운 것과 관계없이/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것….'

지난 8월 15일 고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쓴 ‘방문’이라는 시에는 내면의 갈등을 겪은 뒤의 성숙함이 곳곳에 배어난다. ‘언제나 그랬듯 또/ 당신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의 방문을 반가워하겠지만/ 저에게 있어 당신의 방문은/ 또 하나의 짐입니다// … 당신이 찾아올 때마다/ 그 무게는 점점 더해져 갔습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당신의 방문은 저에게/ 너무나도 힘겨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참지 못하고/ 하늘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당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내 멋대로 살고 싶으니/ ‘당신’을 좀 나에게서 떼내 달라고// … 너무나 지쳐 반항할 힘도 없어진 저는/ 그냥 모든 걸 단념하려 했죠/ 그때 전에 하늘에 대고 한 불평의 답/ 그 침묵의 답이 마음에서 울려왔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당신’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리고 ‘당신’의 방문을 무겁게 만든 건/ 내 자신이었다고/ … ’

지난 9월 1일에 쓴 '태풍'이라는 글에서는 "지금 내게 찾아온 (마음속의)태풍도 어쩌면 하느님께서 나를 시험하기 위해 보내신 게 아닐까. 앞으로도 수없이 찾아올 태풍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눈 지 30여분. 구원이의 눈길이 자꾸 사회탐구 자습서로 향했다. 그가 일분 일초가 바쁜 수험생이란 생각이 스쳤다.

"열심히 하고. 시험 끝나고 다시 만나자."
"네, 근데 이번 수능은 영 자신이 없어서…. 멀리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서울로 올라오는 길. 태풍이 지난 맑은 하늘을 석양이 붉게 물들였다. "아름다운 꽃과 새를 볼 수 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어 감사해요. 세상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지 않나요." 구원이의 목소리가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