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석굴암 복원이 잘못됐음을 뒷받침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현재 석굴암 입구 좌우에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 한 쌍은 다른 팔부신중과 함께 일렬로 서 있지만, 원래는 90도 각도로 꺾어져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 석굴암 보수공사(1913~1915) 직전에 촬영한 사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성균관대 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 사진은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을 촬영했는데, 팔부신중은 현재와는 달리 3개만이 일렬로 서 있다. 나머지 하나는 90도 각도로 꺾여 서 있다. 이 팔부신중의 그림자가 바로 앞의 팔부신중에 비쳐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 1910년대 초반 일제가 보수하기 직전의 석굴암 팔부신 중상 부분(아래 왼쪽 그림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은 다른 팔부신중과 달리 90도로 꺾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심한 훼손으로 붕괴가 우려되던 석굴암을 1910년대 해체한 뒤 복원하면서 좌우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 한 쌍을 다른 팔부신중과 90도 각도가 되도록 세워 놓았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이 1961~1964년 석굴암을 다시 복원하면서 이 팔부신중을 다른 팔부신중과 일렬이 되도록 세웠다. 당시 복원 관계자들은 “일제가 석굴암의 원형도 모르고 훼손시켰다”고 주장해 이후 40여 년간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지난 2001년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씨가 ‘조선미술대관’(1910년 간행)에 실렸던 석굴암 본존불 왼쪽 편의 팔부신중 사진을 공개했지만 당시는 사진 상태 때문에 입구에 있는 팔부신중이 90도 각도로 꺾였다고 100% 장담할 수 없었다”며 “이번 사진은 석굴암의 원형을 찾는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팔부신중 위치가 잘못됐다는 것은 이제 명확해졌다”며 “그러나 지금 당장 석굴암에 손을 댈 수는 없고, 언젠가 보수할 때 고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사진은 1910년대 경주에서 동양헌(東洋軒)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일본인 다나카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타 료사쿠가 소장했다가 1953년 성균관대가 구입해 소장해 왔다.

석굴암 팔부신중의 구조는 명확해졌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많은 논쟁거리를 품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에 자연 채광할 수 있도록 천장에 창이 있었다는 주장(광창설·光窓說)도 그런 예다. 그러나 광창이 천장에 있으면 하중을 견딜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왕릉으로도 알려진 대왕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이라는 설도 있다.

석굴암이 무리수인 √2의 비례미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건축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 측량기사 요네다 미요지가 1940년에 발표한 논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따랐다. 1960년대에 석굴암을 정밀 실측한 결과, 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곳은 요네다의 주장처럼 반지름 3m60 정도의 반듯한 원형이 아니라, 곳에 따라 반지름 길이가 1m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하학적 비례미는 애초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