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해 외국인 주방장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존 이탈리아·인도·일본뿐 아니라 이제는 이란·페루 등 좀처럼 가보기 힘든 나라의 요리사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서울 성균관대 앞 이란식 카레전문점 '페르시안 궁전'(02-763-6050)을 찾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간판이 작고 매장도 골목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정말로 궁전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식당 내부는 왕실 분위기가 나는 벽지와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서 이란 출신의 주방장 겸 사장 샤플(39)씨를 만났다.
"한국에 온 지 벌써 17년이나 됐습니다. 1주일에 6일은 된장찌개, 돌솥비빔밥, 굴비 등 한국 음식을 먹고 하루만 이란 음식을 먹어요. 한국 음식은 건강에 매우 좋은 음식입니다."
샤플씨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데는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이란 남부 아와즈에서 태어난 그는 2년 동안 아와즈 의대를 다녔는데, 1990년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플씨는 일본을 경유해 캐나다로 가서 학교를 알아보려고 했다. 그제서야 일본 바로 옆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올림픽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일본과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일본을 경유하는 김에 한국까지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샤플씨는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려던 중에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런데 그 할머니 가방을 들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고 만 것이다. "할머니 아들이 서울대 교수였어요. 저는 서울대에 초대받아 학교를 구경했고 결국 그곳 어학당에 등록했죠. 그때는 여행비자가 허용하는 3개월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눌러앉아 17년이 지나버렸네요."
샤플씨는 대만 등 외국을 다녀와 여행비자를 갱신했고, 한양대 의대에 입학해서는 학생비자를 받았다. 이후 그는 의학보다 심리학에 관심이 더 많아져 의대를 중퇴하고 서울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던 샤플씨는 한국에서 가질 직업에 대해 고민하다가 2004년 카레전문점 '페르시안 궁전'을 열었다. "당시 500만원 들여서 테이블 네 개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테이블 수가 30여개로 늘었고 지하, 1층, 2층까지 사용하게 됐죠."
그는 식당을 내기 전에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모두 맛있다고 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음식점을 내고 나서는 친구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공짜로 먹을 때는 다들 맛있다고 했는데 식당을 내서 음식값을 받으니까 평가가 냉정해졌어요. 그래서 친구들 입맛에 맞추려 노력했고 결국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 맛을 찾아냈어요."
샤플씨는 매일 모든 테이블을 돌며 손님 의견을 들었고, 컴퓨터로 메뉴별 매출액을 점검해 신통치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렸다. "3개월 동안 손님들의 불평을 들으면서 조금씩 음식 맛을 조정하니까 식당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제는 의사가 환자를 고치듯이 음식으로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합니다. 요리사도 충분히 존경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가 요리사를 꿈꾼 것은 아주 어려서부터였다. 3남 중 막내인 샤플씨는 어머니와 음식을 만드는 일이 가장 즐거웠고 10세 때부터는 형들에게 요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레스토랑건물 4층 작업실에서 카레 소스를 혼자 만듭니다. 재료 배합의 비밀은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아요. 체인점을 내고 싶다는 요청을 수백 번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페르시안 궁전'에서는 채소, 고기 등을 제외하고 모든 식재료를 이란과 인도에서 공수해온다. 그런데 샤플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문이 들었다. "카레가 이란 음식이냐?"고 묻자 샤플씨는 "페르시아 음식"이라고 대답했다. "인도의 일부도 페르시아 영토였습니다. 지금은 카레가 인도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와 가까운 이란 지역에서는 아직도 카레를 즐겨 먹습니다."
'페르시아 궁전'에서는 이란식 카레뿐만 아니라 케밥, 난, 누룽지 등을 맛볼 수 있다. "이란에는 한국의 칼국수, 만두와 비슷한 음식이 있고 누룽지 역시 이란에서 즐겨먹는 음식입니다."
한국 음식이 너무 좋다는 샤플씨는 2000년 한국에 귀화해서 정릉 '나'씨의 시조가 됐다. "한국 친구들이 너무 좋아요. 외국에 비해 우정이 깊은 것 같아요. 저의 한국인 친구는 1500명 정도 됩니다."
한편 중동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페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잉카문명이다. 페루라는 나라가 멀고 낯선 만큼 페루 음식은 한국인에게 생소하다. 하지만 페루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은 맛을 지닌 음식을 자랑한다. 국내에 페루 음식이 알려지게 된 것은 2004년 문을 연 홍대앞 '쿠스코'를 통해서다. '쿠스코'는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으로 잉카제국의 수도를 가리킨다.
지난 8월 21일 페루 음식 전문점 ‘쿠스코’(02-334-6836)에서 주방장 씨로(47)씨와 이원종 사장(37)을 만났다. 순박한 표정이 매력적인 씨로씨는 페루의 아메리카나 요리학교를 나와 4성급인 사보이호텔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다가 이 사장을 만났고 2006년 2월 한국에 왔다. 씨로씨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한국을 알고 있었어요.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고층 빌딩과 세련된 도시 모습이었어요. 저는 페루 쿠스코 근처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씨로씨는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페루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페루 음식은 오랜 전통만큼이나 쉽게 흉내 내거나 바꿀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에요. 해안, 고원, 밀림 등에서 나오는 식재료를 바탕으로 해서 메뉴가 다양합니다."
대표적 페루 음식으로는 해물요리 '세비체'가 있다. 레몬에 숙성된 해물과 셀러리로 만들어 숙취해소용으로 최고라고 한다. 또 한국의 소고기 덮밥과 비슷한 로모 살따도는 한국인 손님이 많이 찾는 메뉴 중 하나이다.
페루 음식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달라고 하자 씨로씨는 “식재료가 지닌 맛을 강하게 표현합니다. 처음 페루 음식을 접하는 분들은 향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이 페루의 맛이기 때문에 쿠스코에서는 주한 페루대사관을 통해 노란 고추, 향신료 등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그는 휴일에는 남한산성이나 사찰 등을 돌며 한국 문화 배우기에 열심이다. 현재 E7(경제활동이 가능한 비자) 비자로 체류하고 있는 씨로씨는 비자가 만료되는 2010년까지는 한국에 거주하면서 페루 음식문화를 전파할 생각이다.
"한국인은 정이 많고 매우 적극적이에요. 제게 먼저 말도 걸고 악수도 청하죠. 그래도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워서 가족들과 인터넷으로 화상채팅을 합니다. 요즘은 아내 몸이 안 좋아 걱정이에요."
씨로씨 옆에서 스페인어 통역을 맡아준 ‘쿠스코’의 이원종 사장은 남미 전문가이다. 1990년대 페루로 여행을 떠난 그는 2000년 페루에 여행·무역회사를 만들었고 2002년 국내에 ‘비바 라틴’이라는 라틴아메리카 전문여행사를 세웠다. 그리고 2004년 페루 음식 전문점 ‘쿠스코’를 연 것이다. “페루에 직접 날아가서 면접과 음식 테스트를 통해 씨로씨를 주방장으로 뽑았어요. 씨로씨 요리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성실한 태도가 좋았어요.”
또 서울 이태원에 즐비한 외국 음식점들 중에는 프랑스 고유의 맛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주방장이 있다. ‘라시갈 몽마르트’(02-796-1244)의 총주방장 플로랑 레스쿠에젝(34)씨가 그 주인공이다.
“14세 때부터 프랑스 요리 공부를 시작했고 4년간 정규교육을 받은 후 고향인 낭트를 떠나 파리에서 요리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 사전에 퓨전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정통 프랑스 요리를 지켜나갈 겁니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돌며 다양한 요리 경험도 쌓았고 파리 최고 레스토랑 중 하나인 ‘몽마르트’와 낭트 최고 레스토랑 중 하나인 ‘라시갈’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라시갈 몽마르트입니다. 서로 다른 두 지방의 독특한 맛을 그대로 전하자는 의미에서 제가 지었죠.”
이곳의 메뉴판도 라시갈과 몽마르트로 나뉘어 있고 식당 인테리어 역시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프랑스 음식은 지역에 따라, 또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느낄 수 있어요. 정통 프랑스 요리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접 프랑스에서 재료를 공수하고 있어요.”
플로랑씨가 한국에 온 것은 올해로 5년째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그는 세계 각국을 도는 크루즈의 주방장이었다. 프랑스를 떠나서 스위스·캐나다·남미 등의 수많은 레스토랑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 “아시아에서는 한 번도 일한 적이 없었어요.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서 프랑스인 주방장을 찾는다는 모집광고를 봤고 2003년 12월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3개월 동안 메뉴선정 작업만 했습니다.”
라시갈 몽마르트는 홍합 요리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플로랑씨는 “저희 레스토랑이 홍합 요리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전통 프랑스 요리를 맛보실 수 있어요. 이번 여름에 새로 메뉴에 올린 니스식 샐러드, 말린 토마토와 따뜻한 시금치 샐러드를 곁들인 바질향의 데친 도미를 권하고 싶네요.” 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외국인 주방장이 요리하는 음식점은 많다. ‘라시갈 몽마르트’와는 또 다른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맛보고 싶다면 이태원의 ‘르생떽스’로 가면 된다. 이곳의 주방장은 ‘두 남자 프랑스 요리로 말을 걸어오다’라는 요리책을 냈고 소믈리에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서울 홍대 앞의 일본라면 전문점 ‘하카다 분코’에 들어서면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라는 외침이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익어가는 면을 바라보는 일본인 주방장의 눈매가 무섭다. 돼지 뼈로 우려낸 진한 육수의 일본식 라면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는 식사 시간을 훨씬 넘긴 때에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음식 맛을 볼 수 있다. 또 청담동 ‘야마모토 스시’의 주방장 야마모토 사다오씨는 롯데호텔 일식당 주방장 출신으로 경력 40년의 베테랑 요리사다.
역시 청담동에 있는 ‘빌라 드 하노이’에서는 경력 20년 이상의 베트남 요리사가 만든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다. 현지에서 직접 재료를 공수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베트남 보양식도 제공하고 있다.
서울 소격동 선재아트센터 1층에 있는 '달'에서는 인도인 요리사 8명이 내놓는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또 압구정동 '알빠르코'에 가면 이탈리아 요리의 본고장이라 일컬어지는 토스카나 지방 요리를 본토 주방장이 재현한다.
이처럼 외국인 주방장이 본토의 맛을 내주는 레스토랑들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이 자국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찾는 곳으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