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연인으로 더 많이 회자되는 카미유 클로델

프랑스의 천재적인 조각가였지만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우리에게 로댕과의 러브스토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미유 클로델은 스무 살 때 로댕을 만나서 그의 제자 겸 조수, 모델,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된다.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자질과 열정으로 가득했으나 미술사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녀를 한 때 로댕의 연인이었던 정신병자로 기억할 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의 비극은 로댕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카미유 클로델의 탁월한 예술적 영감과 재능은 로댕에게 영향을 끼친다. 로댕의 작품제작 활동에 있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의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로댕의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1840~1917)’ 제작에는 그녀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예술세계의 동지이자 경쟁자의 관계로 성장한다.

24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졌으나 그들의 사랑은 로댕의 심한 여성편력 때문에 파경을 맞게 된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최대 거장이었던 로댕의 그늘에 가려 카미유는 로댕에 못지않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에 대한 로댕의 견제와 방해공작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독자적으로 펼치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충격과 조각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으로 인한 우울증과 피해망상,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그녀의 예술적 불꽃은 사그라지고 만다.

세상의 편견에 희생된 천재 조각가

그녀의 뛰어난 천재성과 열정이 시기를 받아서일까. 1913년 3월 어느 날, 집에 있던 카미유 클로델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두 명의 남자 간호사들에게 반항도 못한 채 붙잡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수감 기간 동안 가족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를 퇴원시킬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해두고 남동생인 폴 클로델만이 몇 번 방문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30년을 보낸 뒤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랑의 환희와 고통 고스란히 담아낸 조각 '사쿤탈라'

자신이 순수한 영혼과 열정을 바쳐 사랑했던 연인에게서도 버림받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비운의 천재 예술가, 카미유 클로델. 그녀는 단순히 로댕 때문이 아닌 세상의 편견에 희생된 천재 조각가였다. 그녀를 잊기에는 그녀의 작품이 너무나 훌륭하다.

그녀는 1888년에 발표한 ‘사쿤탈라(Sakuntala: 힌두교 신화로 마술에 걸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쿤탈라가 남편과 재회하는 이야기)’로 살롱전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얻으며 극찬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는 로댕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로댕과의 예술적 교류도 가장 많았던 때로 로댕의 ‘키스(1888~89)’와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인물의 구성과 포즈 등이 유사하다. 로댕이 그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이후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빠져 있는 자신과 로댕의 삐걱거리는 애정을 묘사하듯 ‘사쿤탈라’에는 사랑의 환희와 고통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작품은 석고로 먼저 만들었다가 이후 1905년에 다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카미유 클로델은 10대 때부터 이미 그 실력을 인정 받았으나 사람들은 로댕의 작품을 더 많이 기억한다. 그녀의 작품은 로댕의 그늘에 가려져 로댕 박물관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 최혜원 경희대 강사

다음은 카미유 클로델이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배에 올라야 할 시간이다. 사랑하는 폴,
파도 위 바람처럼 가벼워지는구나.
너무 무거웠던 짐, 때가 되면 스스로 떠나지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사랑,
이제야 고모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 있었다
라고 말할 조카들의 병아리 같은 입
훗날이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