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년 5월. 조선 제5대 임금 문종이 병치레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 왕은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열두 살짜리 단종이었다. 왕권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섭정을 세워야 할 판이었다. 이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기질로만 본다면 호방한 성격에 무예와 학문을 두루 갖춘 수양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을 주무르고 있던 우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등은 강직하고 독선적인 수양을 제쳐두고, 식견과 도량이 넓은 문인 기질의 안평을 낙점하였다.
그러던 1452년 말에 명나라에서 고명(誥命)이 도착하자, 수양은 자신이 직접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올 것을 청한다. 당시 명은 ‘정난의 난’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를 제거하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의 뛰어난 치세가 막을 내린 직후였다. 그런데 ‘강성한 숙부와 어리고 문약한 조카’로 이루어진 왕실 상황이 50여 년 전 명나라나 당시의 조선이나 흡사했다.
이듬해 명에서 돌아온 수양은 스스로 조선의 ‘영락제’가 되었다. 첫 과업은 자신의 아우 안평과 의정부 중신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안평이 김종서와 각별한 사이인, 함경도 절제사 이징옥과 연계되어 군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1453년 계유년 9월, 이런 소문을 바탕으로 수양과 한명회는 ‘생살부’를 작성한다. 그리고 10월 10일 밤, 피비린내 진동하는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수양은 무사들을 직접 끌고 가서 김종서를 대문 앞으로 불러내어 죽인다. 그리고 곧장 왕에게 가서 역모가 있음을 알리는 한편, 왕명을 빙자하여 중신들을 소집하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궐문으로 모여들던 영의정 황보인, 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은 차례로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일단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나중에 약사발을 내려 죽게 한다.
하룻밤 사이에 실권을 잡은 수양은 영의정부사, 내외병마도통사 등 주요 관직을 겸하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455년에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조선 7대 임금 세조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친동생 안평에게 약사발을 내렸으며, 저 유명한 사육신(死六臣)을 역사 속에 탄생시켰다. 그리고 단종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동생 금성대군도 죽였다. 결국에는 유배된 어린 단종마저 죽이고, 한남군, 영풍군 등 나머지 형제들도 대부분 변방으로 내몰았다.
이처럼 세조는 혈육들의 피바람 속에서 즉위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정작 임금으로서 세조는 제법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는 과전을 폐지하고, 직전을 실시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또 호패법, 둔전제 등을 시행하여 강화된 군사력으로 북방개척에도 힘썼다.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고, ‘동국통감’ 등 역사서 편찬을 통하여 학술, 문화에도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이쯤 되면 세조는 괜찮은 임금 같다. 어쩌면 ‘좋은 결과’로 ‘나쁜 과정’을 정당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조는, 죄 없는 어린 조카를 죽인 ‘왕위 찬탈자’라는 오점을 내내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세종에 처지지 않을 치적을 쌓아야 했다. 더불어 백성의 눈물도 닦아주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그의 권위는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이었다.
정변의 명분으로 삼았던 ‘강력한 왕권’도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1468년,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종친인 귀성군 이준에게, 19살 난 예종의 보위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측근이었던 한명회와 훈구 대신들은 나중에 귀성군 이준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장악해버렸다. 더불어 세조가 벌여놓았던 ‘경국대전’ 등의 편찬 사업에 관여하여,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무력화시키고 만다. 김종서는 세조를 낳았고, 세조는 한명회를 낳았다. 한명회는 또 다른 ‘김종서’였다. 거기에 세조의 딜레마가 있었다.
수양은 애초에 무리한 목표를 잡았다. 따라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도 무리가 따랐다. 역사든 개인의 삶이든 결과가 좋다고 과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가 합당해야 과정도 정당하다. ‘계유정난’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