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의 세계
지난 5일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클럽에서 진행된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무대를 제외한 벽면 가득히 16㎜ 카메라와 각종 촬영 장비, 의상, 소품, 간식 등이 즐비했다. 오전 8시부터 한자리에 모인 35명의 사람들은 잠시 한눈팔 새도 없이 어두운 지하 클럽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롤 카메라~(카메라 돌리고), 하이~(준비하고), 액션!" 촬영은 음악을 틀어놓은 채 가수의 립싱크에 맞춰 초 단위로 진행됐다. 가수는 리듬에 맞춰 입술만 움직였다. 오직 노래를 부르는 척 '동작' 연기에만 열을 올렸다. 무대 뒤편의 드럼, 베이스, 기타 밴드 역시 음악에 따라 연주하는 모양새만 흉내 냈다.
감독은 매 순간 조명감독, 촬영감독과 함께 '콘티'(continuity·촬영을 위하여 각본을 바탕으로 필요한 모든 사항을 기록한 것)를 의논했다. 조명 색감과 위치, 의상 등 화면 분위기를 점검하며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몇 번이나 얘기했어, 내 손 방향을 보면서 노래하라니까." 감독은 촬영 도중에도 마음껏 핏대 높여 고함을 질렀다. 실제 가수의 노래는 촬영 후 녹음작업을 통해 합쳐지기 때문에 상관 없다. 조감독은 불안한 모습이었다. 감독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그는 감독한테 '깨진' 가수들이 행여 기가 죽을세라 계속해서 박수치고, 입으로 박자를 넣으며 분위기를 북돋웠다.
클럽 촬영은 오후 7시까지 계속됐다. 165㎡(50여평) 클럽 안에서 장소를 바꿔가며 여러 각도로 가수들의 립싱크 장면을 촬영했고, 여자 바텐더와 남자 손님을 연기한 배우의 스토리 장면을 추가했다. 그리고 짧은 저녁식사. 하루 만에 촬영을 끝내야 하는 스케줄 때문에 이후의 야외 촬영은 당일 밤샘 작업으로 진행됐다. “하루 만에 뮤직비디오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가며 써야 합니다.” 한 현장 스태프의 말이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제 가수들은 뮤직비디오 없이 음반을 발표하지 않는다. 데뷔 앨범은 물론이고, 신곡이 나올 때마다 그 노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대중에게 공개한다. 가수의 열혈 팬들도 뮤직비디오 공개 전부터 감독은 누구이며, 촬영 장소, 배우, 컨셉트, 제작 비용 등을 따져본다. 어느새 뮤직비디오가 일반화되면서 '듣는' 음악이 '보면서 듣는' 음악으로 바뀐 것이다. 다음(Daum)의 뮤직비디오를 담당하는 오이뮤직 황구경 과장은 "하루에 뮤직비디오와 뮤직비디오 제작 과정을 담은 동영상까지 합치면 5편 이상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다"면서 "인기 순위 1위에서 5위까지만 계산해도 하루 7만~10만 명의 사람들이 뮤직비디오를 감상한다"고 했다.
뮤직비디오는 인터넷으로 영상과 음악을 동시에 즐기는 ‘영상 세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가요계의 필수 사항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는’ 뮤직비디오는 해당 가수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과감히 생략하고 유명 배우의 연기만으로 제작한다. 미국이나 유럽과 다른 트렌드다. 98년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한 ‘조성모’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이뤄진 ‘드라마타이즈(dramatized의 일본식 표현·극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뜻)’ 뮤직비디오로 대(大)성공한 뒤 음반 시장에서는 이런 형식의 뮤직비디오가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짧은 단막극을 보듯 케이블TV 또는 인터넷을 통해 뮤직비디오를 즐긴다.
기획사 역시 음반과 뮤직비디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톱스타를 기용하거나 해외 로케 촬영을 담은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로 홍보 효과를 높인다. 뮤직비디오 내용도 일체 비밀에 부치기 일쑤. 인기 가수들의 3~4분 분량의 뮤직 비디오 제작을 위해 1억~2억원의 제작 비용을 지급하고, 화려한 전투 장면이나 CG 장면 등이 포함된 3억~5억원 규모의 블록버스터 뮤직비디오도 심심치 않게 제작된다.
이에 대해 SM엔터테인먼트 김은아 과장은 “특별히 가수를 뮤직비디오에 등장시킬 필요가 없다면 인기 배우 중에서 출연진을 고른다”며 “젊은 영상 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뮤직비디오만 한 콘텐트도 없다”고 했다.
스태프들 모여 '한방'에 촬영
국내 음반 시장에서는 매달 20여 편의 뮤직비디오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일반인의 예상과 달리 뮤직비디오의 1편당 평균 제작 비용은 2000만~3000만원 수준이다. 스타 가수가 아닌 평범한 일반 가수의 앨범 홍보용 뮤직비디오가 주(主)를 이루기 때문이다. 예산은 감독을 포함한 연출부 비용 300만~500만원을 비롯해 촬영, 편집, 조명, 헤어·메이크업, 의상 등에 책정된 금액이 각각 수백 만원에 달한다. 적은 예산으로 말미암아 2~3곳의 세트장 촬영과 거리 촬영만으로 필름을 찍고, 출연진도 가수와 백댄서 몇몇만으로 만든 뮤직 비디오도 흔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중에게 많이 공개되는 블록버스터 뮤직비디오만 눈에 띄어서 그렇지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면 우리나라 뮤직비디오의 편당 평균 제작비용은 3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며 "몇몇 대형 기획사가 의뢰하는 뮤직비디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저가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뮤직비디오는 촬영 기간이 짧다. 하루 만에 촬영을 끝내는 경우도 많다.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3~5일 정도면 촬영을 끝낸다. 영화라면 보통 보름 이상 걸리는 전투 장면도 하루면 촬영이 끝난다. 촬영 장비 역시 천차만별. 영화 촬영과 같은 35㎜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품질이 낮은 6㎜카메라, 16㎜ 카메라를 쓰거나 고가의 HD 카메라로 찍는 등 예산과 상황에 맞게 장비를 마련한다. 수년에 걸쳐 사전 제작을 하고, 고가 장비만으로 수개월에 걸쳐 촬영하는 영화와는 비교조차 허락되지 않는 부분이다.
뮤직비디오는 일부 기획사에서 콘티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감독이 촬영, 조명, 미용, 아트 등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립 회사와 연락해 팀을 짜고, 그들과 함께 콘티를 직접 작성해 뮤직비디오를 찍는다. 단기간 30~40명의 스태프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방’에 촬영을 끝내는 식이다.
뮤직비디오 감독은 중간지대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가 대거 생산되는 한국 시장에서 뮤직비디오 감독들 중 상당수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살아간다.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비교적 데뷔가 쉬운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얻어 영화판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스물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보아, 성시경, GOD, SG워너비, 신혜성 등 120여 편의 뮤직비디오를 찍어온 윤홍승(32) 감독. 대학 졸업 후 연극, 영화, CF 업계에서 연출, 조감독을 거쳤고, 뮤직비디오 조감독을 거쳐 어린 나이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현재 심형래가 출연했던 ‘우뢰매’ 시나리오를 각색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는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면 누구나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욕심을 가진다”면서 “뮤직비디오를 통해 내용 있는 영상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서 제대로 된 영화 한 편씩은 만들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반면, CF 업계를 넘나들며 뮤직비디오 겸 CF 감독으로 자리 잡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차은택, 박명천 등 두 가지 분야에서 동시에 명성을 얻은 감독도 상당수다.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서 CF 제작을 겸하기도 하기 때문에 연출 스태프들은 두 분야를 동시에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또, 조명, 촬영, 메이크업, 의상 등을 맡는 독립 회사 대부분도 CF와 뮤직비디오를 함께 다룬다. 3개월 전 씨야의 뮤직비디오로 감독 타이틀을 얻게 된 강동수씨(30)는 “나 역시 CF, 뮤직비디오 조감독을 같이 맡아왔다”면서 “두 분야 모두 상업 예술이고, 감각적인 영상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명성을 얻으려면 혹독한 조감독 시절을 보내야만 한다.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가 1~2년 동안 막내 생활을 하면서 짐 나르고, 촬영장 인파 통제하며 보조 출연, 세트장 꾸미기, 식사 장소 섭외 등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한다. 업계에서는 ‘조감독 생활 1년이면 여자친구가 떠나고, 2년이면 불알친구가 떠나고, 3년이면 부모가 떠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보수도 낮다. 아르바이트 계약이기 때문에 일당 5000원밖에 받지 못하며 이것도 촬영장이 아닌 사무실 내근을 한 날에는 내근 아르바이트비 2000원밖에 못 받는다. 그나마 작업이 많은 달에는 50만~70만원 정도 벌지만 평균 2~3달 정도는 한 푼도 못 번다. 하지만 꿈은 크다. 30개월째 뮤직비디오 연출부 아르바이트생으로 생활하고 있는 소은호(25)씨는 “지금은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만의 감각적인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했다.
음반시장 불황 속 ‘쓴맛’ 보는 감독들 수두룩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뮤직비디오 감독은 100여명 정도로 알려졌다. 대형기획사로부터 발주를 받아 스타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감독은 10여명 안팎이다. 1억원 규모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해 제작비의 10% 정도를 챙길 수 있는 감독은 손꼽힐 정도다. 나머지 감독들은 작은 기획사가 발굴한 신인이나 인지도가 높지 않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찍을 뿐이다. 한 달 제작비 2000만~3000만원 규모의 뮤직비디오 1~2편을 찍어 300만~500만원을 챙길 수 있는 감독도 50%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 사람들의 말이다.
과거 10여 년 동안 급속한 성장세를 보여온 뮤직비디오 시장은 현재 정체 국면에 들어서 있다. 음반 산업이 불황이고 뮤직비디오 제작 물량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감독들끼리 경쟁도 치열하다. 블록버스터 뮤직비디오를 맡지 못하는 이름 없는 감독들은 어떻게든 한 편이라도 더 찍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천혁진 감독은 “음반 시장이 불황인 상황에서 기획사도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런 까닭에 저 예산만으로도 안정된 품질을 보장 받고 싶어한다”며 “유명 감독조차도 적은 제작비로 수준 높은 콘텐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기획사에서는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뮤직비디오 감독을 ‘간택’하기도 한다. 보통 3~5명의 감독이 가수의 노래에 적합한 자신만의 콘티와 제작 방식을 소개하고, 물량을 따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이름 없던 감독들이 유명세를 타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뮤직비디오 제작 비용을 낮춰 작품의 질만 떨어뜨린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2000년 이후 뮤직비디오 제작 단가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상당수의 뮤직비디오 감독들은 몇 편의 뮤직비디오를 끝으로 업계를 떠나기도 한다. 2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이쪽 세계로 뛰어들지만, 쓴맛만 보고 이 바닥을 뜬다. 소형 기획사의 저가 뮤직비디오 몇 편으로 감독 데뷔를 하지만 도리어 제작비만 떼이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람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 경력이 짧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는 오랜 기간 뮤직비디오를 접한, 안목 높은 대형 기획사의 입맛을 맞추기도 어렵다. 인순이, 홍경민, 서지영, 거북이, 체리필터 등 125편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서인교(33) 감독은 “뮤직비디오 한두 편 찍다가 쪽박만 차고 업계에서 사라지는 감독이 많다”면서 “서로 일을 맡으려고 남을 헐뜯고, 중간에서 제작 물량을 뺏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 뮤직비디오 시장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