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파문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짜 학위’ 고백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하다.
그 가운데 ‘간판’하면 남부럽지 않을 의사들도 의학박사 간판으로 바꿔 달기 위해 온갖 편법과 갖가지 노력으로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펴낸 ‘2006년 전국회원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소속 의사 7만1940명 중 19.6%가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대학병원의 교수나 전임의로 박사학위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 동네 병·의원을 운영하는 의사(개원의)들도 5명 중 1명(22.4%)이 의학박사였다. 종합병원의 봉직의(페이닥터·pay doctor)들도 4명 중 1명(25.8%)은 박사학위를 땄다.
의료정책연구소 최운배 부장은 “의사들의 대부분이 대학병원 봉직의 출신이 많고, 개원 전에 석·박사 학위를 따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면서 “진료목적상 필요한 경우도 많아 취득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의대서 의학박사까지 15년 = 현재 의학박사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의대의 경우 예과 2년과 본과 4년, 의학석사 2년, 의학박사 2~4년을, 의학전문대학원은 학사 4년과 의무석사 4년, 의학박사 2~4년을 거쳐야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선 의과대학을 나오거나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후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면 된다. 나머지 석·박사 과정은 의사면허와 상관없는 학술 학위로 임상보다 실험연구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개원 의사들은 어떻게 박사학위를 따고 있을까. 박사학위 과정은 학점 당 매학기 15시간 이상 이수를 해야 하고, 전체 강의 일수의 3분의 2 혹은 4분의 3 이상을 출석해 36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한다.
학부과정과 비교하면 상당히 여유 있어 보이지만 환자진료로 바쁜 개원 의사들로서는 부담스런 조건이다.
우선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상당수 의사들은 전공의 과정과 전임의를 거치면서 학위를 밟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본과 4년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딴 뒤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가정의학과 3년) 등 전공의로 임상 수련교육을 받는 시간(5년)과 의학석사 2년, 의학박사 2~4년 기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수련기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란 쉽지 않다. 워낙 바쁘고 고된 생활을 병행하다보니 5차례의 박사논문 심사과정을 다 밟는 게 벅차다.
또 한가지 문제는 군대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중간에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3년을 빼야 한다.
정상적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까지 꼬박 13~15년 정도가 걸리는 셈이다.
◇ “박사논문은 위탁, 연구비용만 지원” = 여기까지가 정통코스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대리출석이나 부풀려진 논문 심사비, 논문 대필 등의 일부 편법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 적을 두고 있을 때보다 봉직의나 개원의로 있을 때 ‘검은 뒷거래’가 급증한다는 게 의료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박사학위 논문을 자신이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지도교수가 진행 중인 대학연구실에 사실상 위탁하고, 당사자는 이 연구에 필요한 지원비를 내는 것이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 중인 K씨는 “대개 지도교수가 운영하는 실험실 연구에 참여하는데, 이 경우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은 아니고 연구비를 대는 수준”이라며 “연구원들 회식비부터 교수 인사비 등 포함하면 박사학위 논문 한 편당 3000만원 정도 든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5년에는 일부 지방대 교수들이 개원의로부터 많게는 수억 원대의 돈을 받고 의학·한의학 박사학위를 내준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동안 의료계 일각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던 ‘학위 매매’가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적발된 교수들은 개원 의사들의 학점이수, 실험, 논문작성 등을 대행했다. 개원 의사들은 환자진료 때문에 바쁘고, 대학교수는 대학재정, 연구비 조달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박사학위가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 “의사가 환자 보는데 박사학위가 웬 말” = 일부 의대 대학원의 경우 정원수가 늘어난 것도 박사학위 취득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학원 정원의 경우 전체 정원수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지만 과별 정원은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 대학원에서는 인문과학 등 비인기과의 정원을 줄이고 의과 대학원의 정원을 늘리고 있다는 것.
K대학의 S교수는 “예전에는 대학원 입학하고 싶어도 정원이 안 나와서 기다려야 했는데, 요즘엔 정원이 늘어 석·박사 과정이 빨라졌다”면서 “석·박사 통합과정이 생기면서 취득기간이 1년 빨라진 것도 한 몫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청렴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는 2005년 말 10만9196명으로, 최근 5년간 연평균 7200여명이 배출되고 있으며 이 중 의학분야가 1100여명으로 15%를 차지한다.
박사학위 과정 등록 인원 중 의학분야는 87%가 직장인으로 타 분야에 비해 의학박사 취득자와 직장인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가짜 학위로 버젓이 영업을 하다 환자 피해를 키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런 경우 의학박사라는 ‘간판’이 이름값을 하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강남 일대 주부들과 유명 연예인들 사이에 일명 ‘신의 손’으로 불리던 H씨의 경우 국내 모 사립 의과대 졸업증과 영국 의학박사 학위를 위조해 무면허 성형수술을 하다 피해자들의 수술 후유증 호소로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의대 J교수는 “한동안 의사면 당연히 의학박사 학위를 가져야 권위가 있는 것처럼 환자들이 알고 있다”면서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어 의사도 학위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의학박사제도는 일제의 잔재”라며 “의사가 환자를 보는데 의학박사 학위가 필요 없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