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원 워싱턴 특파원

‘유포리아(euphoria)’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행복감, 도취감’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약물 같은 외부적 자극에 의해 만들어지는 극상의 행복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전에는 사용빈도를 나타내는 표시도 없을 만큼 일상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 단어다.

기자는 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발표된 후, 워싱턴에서 이 단어를 이렇게 빈번하게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이클 그린(Geeen) 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9일 인터뷰에서 이 단어를 5~6 차례 가까이 사용했다. “정상회담으로 평화가 이뤄질 것 같은 ‘도취감(euphoria)’이 이뤄지면, 북한의 비핵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8일 워싱턴의 본사 사무실에서 대담을 가진 존스홉킨스대 돈 오버도퍼(Oberdorfer) 교수와 부시 행정부의 대북특사를 지낸 잭 프리처드(Pritchard) KEI(한국경제연구소) 소장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한국이 남북정상회담의 ‘도취감’에 취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를 했다. 미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Klingner) 선임연구원도 남북정상회담이 가져올 ‘도취감’의 좋지 않은 영향을 경계했다.

남북한이 동시에 발표한 정상회담 발표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은 바로 이 한 단어, ‘euphoria’로 요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리아 와처(Korea Watcher)’로 불리는 한반도 전문가 외에도 미 행정부의 관계자들도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며 8·28 남북정상회담의 ‘도취감’ 후폭풍을 경계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후 한국 사회가 집단적 최면처럼 걸린 ‘평화 도취감’에 다시 빠져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시계를 돌려서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후로 돌아가 보자. 6·15 남북 정상회담은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지만, 역사적인 성명으로 평가받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수백만명을 굶어 죽게 하고, 반(反)체제 인사를 즉결처형하는 독재자에서 하루 아침에 ‘풍류가 있고 멋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남북정상회담 참가 티켓을 거머쥐었던 인사들은 평양에 다녀온 후 대북(對北) 찬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제 한반도에 전쟁 위협은 없다”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서울 도착 후 일성(一聲)에 평화가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도취감’이 온 사회를 감쌌다.

그러나, 7년이 넘은 지금 남북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화된 것은 없고, 오히려 안보상황은 악화된 상태다.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수령의 유훈(遺訓)”이라고 말하지만, 지난해 10월 핵실험을 통해 사실상 핵보유 국가가 됐다. 언제라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도록 핵 무기 10여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50㎏을 확보했다는 것이 국정원의 평가다. 또, 같은 해 7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조업하는 어선들이 있는 동해를 향해 대포동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북한은 올해 초에야 핵 불능화를 명시한 2·13 합의에 합의한 후, 영변 핵 시설을 동결했지만 이 조치는 언제라도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런 상황에서 철저히 정치적인 목적에서 열리는 8·28 남북정상회담이 구체적인 성과 없이 평화 도취감을 발산하고, 국민들이 이에 취할 경우, 다시 7년을 안보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기대는 하지만 환상을 갖지 말라’는 워싱턴의 충고를 한번쯤 새겨볼 만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