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의 하나인 한국에서 무속신앙(shamanism)이 부활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7일 보도했다. NYT는 "한국인들은 무속신앙을 한국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특히 올해와 같은 선거철에는 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속인과 점집을 찾는 정치인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 〈본지 7월9일자 보도〉 )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지요. 누구 밑에 줄 서야 하는지 뻔한 내용만 묻습니다."
유명 역술인, 무속인들의 영업장 문지방이 닳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이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이번에 정계로 한번 나가 볼까요?" "누가 당선될까요?" "어느 캠프로 가야 살 수 있을까요?" 으레 질문은 정해져 있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명확하다. 대선 윤곽이 잡히기 전, 미리미리 자리를 한 번 잡아보려는 사람들이다.
서울 강남에서 역술관을 운영하다가 여의도에 다시 터를 잡은 남덕(남덕역학연구소장)씨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정치관련 문의를 받는다. "식사 한 번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호텔방이나 서울 외곽의 음식점을 찾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이 많이 찾느냐?”라는 질문에 남씨는 “중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친척, 보좌관, 친구 등 찾아오는 이들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다 누가 당선될지, 줄 잘 서면 앞날은 보장될지에 관해서만 묻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과 관련해 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질문도 많아지고, 따져보는 사안도 많아 한 차례 면담이 2~3시간은 쉽게 넘긴다고 했다.
“지방 유지 중에서도 대통령에 출마하면 몇 표나 얻겠느냐고 물어오는 사람까지 더러 있을 정도로 역술가들이 바빠졌다”는 여성 역술인 김민정씨. 그녀에 따르면 작년 말부터 이미 ‘줄 서기’에 관심 있는 정치인, 변호사, 교수, 언론인들은 유명 역술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김씨는 “보통 줄 서려고 하는 사람과 줄 세우는 사람의 사주가 얼마나 잘 맞는지 따져 봐야 하기 때문에 역술가들은 유력 후보들의 사주는 이전부터 다 가지고 있다”며 “대선을 치르는 날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까지 유추해 역술을 따진다”고 했다.
◆당선자는 정해져 있다?
이름있는 역술인, 무속인들 중 일부는 벌써부터 당선자를 꼽고 있다. 대선 예측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심진송씨는 항간에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예측했다고 유명해진 무속인이다. “지난 일요일에도 대선 문제 때문에 백두산에 가서 기도만 드리고 돌아왔다”는 심씨는 2005년 말 올해 대선에서 당선될 사람을 보았다며, 언론을 통해 당선자 한 명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눈이 흐려진 게 아니냐” “그쪽 후보와 무슨 연결이 되어 있지 않나”는 비판을 받자, 그녀는 “두고 봐라,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는 대꾸로 일관하는 중이다.
한국성명학회 김광일 회장은 “나 역시 올해 초에 한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지만 지금까지도 ‘어떻게 하면 운을 바꿀 수 있겠냐’는 다른 후보측 사람들의 문의를 계속해서 받는다”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반대편 사람들이 사람들 눈을 피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온다”고 했다. “내가 지목한 후보의 운을 꺾을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그 사람이 당선된다”는 예측이 김씨의 현재까지의 진단. 하지만 “어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을까?”라는 정치 인사들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해 말에는 정치와 관련한 문의를 받는 경우가 한 달에 1~2건 정도였지만 올해 들어서는 매달 20여 건이 기본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각 다른 후보자를 지명한 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헐뜯는 일도 발생한다. 역술인 A씨는 “얼굴 내밀어서 돈만 벌려고 하는 가짜들이 수두룩하다”며 “유력 후보마다 자신을 지명한 역술인이나 무속인들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엉터리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를 지명한 역술인 김모씨는 A씨에 대해 “그 사람이야말로 엉터리”라고 반박했다.
◆천기누설은 할 수 없다?
정치계 인사들은 무속인이나 역술인들만 찾지 않는다. ‘대운(大運)’을 예지한다고 알려진 유명 ‘큰스님’들 역시 정치인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다. 경북 봉화군 현불사의 설송(雪松) 스님은 암암리에 정치인들 사이에서 예언력을 지닌 인물로 회자된다. 대선과 관련해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직접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현불사 관계자는 “큰스님이 사람들에게 예언가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극히 꺼리시고 계시다”고 했다.
일반 역술인 중에서도 대선 관련 언급은 일절 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역술인협회 청풍 이사장은 “대선 같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 자칫 잘못 말하면 천기누설이 되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흘러가는 대로 보고만 있으라고 말한다”고 했다. 대한경신연합회 한이슬 부회장도 “오는 사람마다 이 문제를 물어보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다고만 말할 뿐이다”고 했다.
특히 대선에 관심이 많은 기업 CEO들 역시 으레 용하다는 역술관과 신당을 찾는다. 한 유명 역술인은 “대기업 관계자들보다 어중간한 중소기업인들이 대선에 누가 될지 물어본다”고 했다.
역술인들의 모임인 한국역술인협회와 무속인들의 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에 문의해본 결과, 총 등록 회원은 약 15만명. 각종 유사 단체에서 활동중인 사람들과 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30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 게 이쪽 업계의 추산이다. 이들은 00도사, 00무당, 00신당, 00연구소 등 형형색색의 문패를 걸고 점을 치지만 이름 있는 인사들은 채 100명도 되지 않는다.
역술가, 무속인들의 규모가 정해져 있고, 정치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이 이들에게 쏠리다 보니 몇 마디 말로 여론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힘 또한 대단하다. 정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정부기관에서 유명 역술인들을 조정해 민심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려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여·야당을 막론하고 유명 역술인들의 대선 예측과 분석을 사전에 조사해 참고 자료로 활용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무속인 B씨는 “정·관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하수인들은 누가 시켜서 왔는지 실명은 밝히진 않는다”며 “‘이 사람이 당선된다는 쪽으로 예언해 달라’면서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역술인, 무속인을 찾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사례금은 얼마나 될까? 당사자들은 정해진 금액 외에 따로 받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3만~5만원, 많아도 10만 원 이상 받는 일은 없다는 게 공식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정가 사람들은 “좋은 말 듣고, 이거다 싶어 기분이 좋아질 때는 예의상 100만원은 내놓는다”고 말한다. 또 정치인과 왕래가 잦은 역술인, 무속인들은 사례금 외에 ‘관리비’를 받기도 한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알고 지내는 정치인들이 사람을 보내 수백만 원씩 넣은 흰 봉투를 건넨다는 것이다. 역술인 C씨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얼굴 한 번 보거나 특별한 날이 되면 200만~300만 원은 그냥 받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선 후보 지명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역술인 조관우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선만 다가오면 정계 사람들은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역술가나 무속인을 찾으며, 평소에도 잘 아는 유명 역술인, 무속인 한두 명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서 “‘하늘이 당신을 돕는다’는 역술인의 말이 그들에게 심리적 위안을 안겨주고, 한번 일을 벌일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