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위즈덤하우스 김태영 대표는 내부회의에서 "5000개의 키워드를 뽑아 책을 출간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연간 매출 200억원을 올리는 위즈덤하우스는 출판인회의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목록 20위 내에 유일하게 3권의 책을 올려놓고 있는 잘나가는 출판사다. 하지만 김 대표는 "더 분발하지 않으면 회사가 어렵다"고 직원들을 질책했다. 엄살만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라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베스트셀러 때문에 출판사 경영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를 내면 망한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교보문고 집계)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를 낸 명진출판은 요즘 비용을 절감하는 긴축정책을 펴고 있다. 5년 전 밀리언셀러 '화'를 출간하고 부도 직전에 몰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명진출판 한상만 대표는 "정신 없이 돈이 들어오는 것만 보이고 비용이 나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광고비와 인세 등을 지불하려는데 돈이 없었다"고 말했다.

출판계 속설 중에는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는 망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여러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밀리언셀러 '세상을 보는 지혜'를 낸 둥지, '배꼽'의 장원, '손자병법'과 '영웅문'을 낸 고려원, '홀로서기'의 청하, '인간시장'의 행림, '연탄길'의 삼진기획 등이다.

대형 베스트셀러가 터지면 직원을 충원하고 마케팅 비용을 늘리게 된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는 1~2년 조정기를 거쳐 판매부수가 거의 사라지는데 일단 늘어난 비용은 갑자기 줄이기 어렵다. 일부 출판사는 사장이 도박에 빠져들거나 교과서 시장 등 다른 사업에 뛰어들다가 도산을 맞기도 했다. 문예출판사 전병석 대표는 "베스트셀러의 '맛'을 보고 나면 언제든 다시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며 "착실하게 생명력 있는 책을 내지 않고 일과성으로 화제의 책을 기획하다 그 책이 뜨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백 리스트'가 더 중요하다

100만부가 팔리는 1권의 베스트셀러보다는 1년에 1000부씩 팔리는 책 1000종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른바 '백 리스트(back list)'의 위력이다. 매출액 규모 5위권 내의 국내 주요 출판사들이 대형 베스트셀러를 내지 않고도 안정된 매출을 거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민음사는 1년에 1000부 이상 팔리는 책 1300종을 가지고 있다. 정가를 1만원이라고 할 때 연간 최소 130억 원의 고정 매출 위에서 새로운 책을 계속 내고 있다는 계산이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는 "한 권의 베스트셀러보다는 꾸준히 팔릴 책 위주로 출판기획을 한다"며 "베스트셀러에 의존하는 출판은 경영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때 '베스트셀러 제조기'라고 불렸던 박영률 커뮤니케이션북스 대표는 "지금은 베스트셀러를 일부러 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수익과 비용을 계산할 수 있어야 기업이라 할 수 있다"며 "손익분기점을 생각하지 않고 '대박'만을 바라는 것은 도박이지 출판이 아니다"고 말했다.

'백 리스트'가 튼튼해야 베스트셀러의 효과도 커진다. 꾸준히 팔리는 책들이 뒤를 받쳐주는 상태에서 터진 '대박'은 고스란히 알짜 수익이 되기 때문이다. 바다출판사 김인호 대표는 "백 리스트가 있는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가 터지면 판이 커지게 되지만, 백 리스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될 경우 그 출판사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