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성을 농락한 끝에 결국 지옥에 떨어져 천벌을 받는, 난봉꾼 전설의 주인공 돈 주앙(Don Juan)은 오늘날에도 ‘사랑 없는 섹스의 화신’으로 인용되는 부정적인 존재다. 지옥에 끌려간 돈 주앙은 “1003명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저승사자에게 자랑하지만 그 중 단 한 명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대의 색마는 지난 수세기 동안 바이런의 시와 한트케의 소설, 모차르트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예술적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샘 구실을 해 왔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는 80여 편이 넘는다는 돈 주앙 버전에 가장 최근 추가된, 돈 주앙 막사의 신참병이다.
소설은 돈 주앙의 일기가 발견됐다는 설정 아래, 그를 전설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 제시해 이야기의 긴장미를 끌어올린다. 돈 주앙이 직접 쓴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색마의 탄생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사창가 여인의 아이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자란 성장과정, 수녀를 사랑하다 호색한으로 나서게 된 경위, 그의 현란한 방중술 등이 역사상의 기록처럼 생생하게 제시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부여하는 돈 주앙의 새로운 역할은 그가 온갖 여성 편력을 끝내고 마침내 한 여자에게 정착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정착의 과정을 그린 연애 모험담이다.
돈 주앙의 호색에 대한 이 소설의 재해석도 흥미롭다. 돈 주앙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기의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과 전쟁 등으로 인해 남자가 부족했던 시기. 그러나 종교적 가르침이 여성들의 정당한 욕망을 억압하고 있었다. 작가는 신대륙 무역선이 가져다 주는 보물로 흥청대는 세비야의 거리 풍경과 자유를 갈망하는 새로운 분위기를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중세 유럽의 엄격한 종교적 윤리관과 대비해가며 돈 주앙을 시대를 앞서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숱한 염문에 빠져들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돈 주앙은 그녀들을 구원하겠다고 선언한다. “수많은 외로운 아내들, 아버지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사는 수많은 딸들을 생각해 봐. … 이것이야 말로 밤의 정복자인 호색한이 맡아야 할 경건한 역할이지.”
지난 3월 전 세계 20여개국 언론사를 작품 무대인 세비야로 초청해 영화 시사회 하듯 소설 설명회를 열어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