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작(寡作)의 작가 이동하(65·중앙대 문창과 교수)가 10년 만에 펴낸 신작 소설집이다. 최근 영어로 번역된 장편 ‘장난감 도시’ 등을 통해 맑고 정갈한 언어의 소설 세계를 펼쳐보인 작가 이동하는 1966년 등단 이후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현대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등을 받은 중진 작가다. 압축과 절제라는 단편 소설의 전통적 미학을 고수해온 작가는 절차탁마 끝에 내놓은 10편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각기 다른 색채의 단편들을 모은 책이지만,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우리 시대 보통사람의 설화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 나타난 작가의 인생관은 ‘운명으로부터 당하는 봉변만큼 가혹한 것은 없다’라는 수록작 ‘앙앙불락’의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집의 대다수 작품들을 읽어보면 성실하게 생활하는 소시민에게 어느날 느닷없이 삶의 일대전기가 찾아온다. 주어진 운명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의 삶은 변화 앞에서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거기에 휘둘리다가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기 쉽다. 작가는 값싼 동정이나 연민을 던지지 않은 채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서글픈 소시민의 삶을 그려낸다. 독자에게 억지로 감동을 요구하지 않지만, 결국엔 슬픈 앙금같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 이동하 단편 소설의 특징이다.
소설집의 얼굴이 된 단편 ‘우렁각시는 알까?’는 등장 인물에 대한 작가의 방관자적 자세와 미학적 거리 감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작은 도시에서 영업용 택시를 몰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노모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사내 황보만석씨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화자는 황보만석씨를 아는 지인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한다. 화자는 황보만석씨에 대한 소문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줄 뿐이다. ‘만석이네 집에 우렁각시가 있다네…’
불우한 나무꾼에게 복을 안겨준 천사처럼 나타난 설화 속의 우렁각시처럼 만석이네 집에 어느날 느닷없이 ‘몸집이 자그마하고 날씬한 여자’가 들어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늘 숙취로 찌들어있던 낯빛이 몰라보게 해맑아졌으며, 궁기를 숨길 수 없던 그 입성도 남방이나 바지나 양말까지 새물 일습으로 바뀐 게…’ 라며 화자는 주인공의 변모를 수다스럽게 옮긴다. 그 여자의 정체는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벼락처럼 황보씨의 집에 떨어진 그녀는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난 진짜 가족의 손에 이끌려 사라져버린다. 잠시 행복에 겨웠던 황보씨는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노모는 실의 끝에 세상을 뜨고, 폐인이 된 황보씨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동사(凍死)한 채 발견된다. 우렁각시 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에 불과할 뿐이고, 현실은 그 설화 속에 담긴 인간의 소박한 염원을 쉽게 배신한다. 타인의 불행이란 설화를 접한 화자에게 궁금한 것은 또 다른 설화일 뿐이다. ‘황보만석씨의 그토록 불행한 죽음을 우렁각시는 알까? 이제 사람들은 그것이 문득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올해 학기를 끝으로 강단에서 은퇴하는 작가는 “요즘 내 또래 사람들의 집에 우렁각시가 아주 많다고 해요”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년 퇴직을 한 남자들이지요. 아내가 외출하면 밥도 하고, 청소도 해놓은 채 아내를 기다린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