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바둑계에서 명실공히 ‘메카’로 통했다.

사카다(坂田榮男), 후지사와(藤澤秀行), 이시다(石田芳夫) 등 일본 최고수들의 기보(棋譜)는 한국 또는 중국의 대다수 프로기사들에게 교과서로 통했다. 한 중 유망 신예들이 다투어 일본으로 건너가 선진 문물을 익혔다. 수백 년에 걸쳐 국록(國祿)을 주어가며 바둑을 육성한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서구를 향해 보급에 나설 만큼 바둑 선도국가였다.

하지만 2000년대 진입을 전후해 일본의 바둑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추월 당하면서 오늘날엔 바둑 최약체 국가로 전락했다. 국제 예선전에선 일본 기사들이 전멸하기 일쑤고, 일본 기사의 세계 제패는 ‘가뭄에 콩 나는 격’이 돼 버렸다. 세계 문화 역사에서 일본의 바둑만큼 급격히 조락(凋落)의 길을 걸은 분야도 흔치 않다는 지적을 듣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바둑과 경쟁 관계인 컴퓨터 게임, 장기 등으로부터 자기 영역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게 꼽힌다. 일본에선 주요 타이틀전이 열릴 경우 아직도 많은 방청객이 몰리지만 그 대부분이 노인층이다. 선풍적 히트를 친 바둑 만화 ‘히카루의 바둑’ 출판 이후 젊은 팬들이 많이 돌아왔으나 옛 영화 재현엔 아직도 크게 미흡한 형편이다.

또 하나는 일본 바둑의 미학(美學) 추구적 전통이 한, 중국의 실전적 스타일에 의해 밀려났다는 분석이다. 이것은 일본 바둑이 제일이란 지나친 자신감과 연결된다. 일본은 아직도 자국 타이틀을 세계 타이틀보다 위에 둔다. 그러고선 “이틀 걸이 바둑에 익숙한 일본의 고수들이 3시간짜리 국제 대회에서 부진한 것은 당연하다”며 애써 자위한다. 일본 바둑계 몰락의 진짜 이유는 뿌리 깊은 오만과 아집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성기 때의 절반 가까이까지 떨어졌던 일본 바둑 인구는 다시 서서히 상향 커브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대회 성적도 완만하지만 회복 추세다. 바둑이 동양 4국(한 중 일 대만)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아직도 세계화를 못 이룬 상황에서 일본은 적어도 그 중 한 개의 축은 좀 더 지탱해줘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