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박고석 作 '노적몽' ② 박고석 作 '도봉산' ③ 사진작가 강문구가 1974년 설악산에서 찍은 고(故) 박 화백의 모습 '두가현' 제공

‘5월 23일 오후 4시 박고석 5주기전 사간동 현대화랑 자리를 빛내주세요 5/23 7:35 AM’

디자이너 박기태씨가 이른 아침에 보내온 문자였다. 수업이 있어서 행사에 맞춰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만간 들르겠다는 답 문자로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산(山)의 화가’ 박고석의 그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그림을 본다면 인사야 나중 문제가 아니겠는가.

서가에서 그가 생전에 출간한 ‘글 그림 박고석’(1995, 열화당)을 찾았다. 대동강 주변의 자연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질풍노도의 나날을 보냈던 중학시절, 힘겨웠던 일본 유학시절, 생계와 예술 사이에서 몸부림쳤던 한국전쟁 시기 등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전쟁 때 만나 동고동락한 ‘소의 화가’ 이중섭에 대한 기록에서는 둘이 나누었던 예술적 열정과 인간적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피난지 부산에서 소주와 빈대떡으로 연명을 하며, 환멸의 현실 속에서도 예술혼을 놓지 않았던 둘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박고석과 이중섭은 1952년 부산에서 손응성 한묵 이봉상 등과 함께 기조전(其潮展) 창립동인전을 열어 폐허 속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또한 1957년부터는 유영국 황염수 이계상 한묵 천경자 등과 함께 ‘모던아트’라는 이름으로 동인전을 기획하여 전후 한국미술계에 새 흐름을 도입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설악산 도봉산 유달산 등 산을 주제로 하여 투박한 재질감과 강렬한 색채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했다.

1983년에는 정릉시대를 마감하고 명륜동에 작업실 겸 살림집을 마련하였는데, 집을 설계한 사람은 박고석의 처남이자 ‘공간’의 대표였던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고석이 있는 공간(古石空間), 또는 명륜동의 집은 김수근의 건축미학이 생활공간 속에 반영된 건축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틀 후 현대화랑 뒤편의 두가헌에 들렀다. 생각보다는 작은 규모의 전시회다. 그의 대표작 10여 점과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 1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고석을 따라서 산행에 나선다는 기분으로 작품들과 만난다.

‘도봉산’(1974)은 평면에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듯한 유화의 터치를 보여준다. 특히 황토색 하늘에 무심하게 떠있는 푸른 구름 한 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노적봉’(1980년대)에는 동심의 세계를 품은 듯한 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와 같은 자연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된다. 푸른 윤곽선을 사용한 ‘토왕성폭포’(1974)와 파란색 나무가 등장하는 ‘새재풍경’(1978)을 보면 화면 중앙에 군데군데 뭉쳐진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 용솟음친다. 그의 그림들에서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색은 에너지고 에너지는 각기 다른 색을 갖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박고석의 굵고 거친 테두리 선은 야수파의 그것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색채의 흐름은 테두리 선을 끊임없이 흐트러뜨린다. 테두리 선은 형태를 갖추려 하고 색깔들은 테두리를 벗어나려 한다. 산에 잠재되어 있는 형식적 아름다움과 다양한 역동성을 동시에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고석의 산은 정물도 풍경도 아니다. 어쩌면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산에 잠재된 자연의 기(氣), 생명력, 운동성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산을 감싸고 있는 기의 흐름과 화가가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에너지가 캔버스 위에서 뒤엉켜 뒹굴고 있다는 느낌.

계단을 올라가자 박고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찍은 사진이다.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이 사진에는 두 개의 선이 만나고 있다. 하나는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서 스케치북의 펜으로 이어지는 선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에서 허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선이다. 두 선은 먼 산을 응시하는 눈에 의해서 하나로 만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박고석 자신이 영락없는 산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이 되어 산을 그리고 있는 사람, 산에서 산의 모습을 하고 산 그림을 그린 사람. 그냥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에 힘겨루기를 해야 했던 ‘황토기’(김동리)의 두 장사 억쇠와 득보처럼, 산과 화가 역시 웃으면서 힘을 겨루고 있지는 않았을까.

※‘박고석 5주기전(展)’은 서울 사간동 두가헌 갤러리에서 6월 10일까지 열린다. (02)3210-2111, http://doart.co.kr/dogah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