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200만원이면 황제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의료비는 한국보다 얼마나 저렴합니까?” 질문이 끝없이 쏟아졌다.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전국은행연합회관 컨벤션 홀에서 열린 ‘동남아 이민정책 설명회’(한국은퇴자협회 주최).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대사가 직접 나와 ‘은퇴 이민’ 정보를 제공하는 자리였다. 좌석을 가득 메운 150여명 가운데 60대 노인이 대부분이었고 30~40대 주부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들은 3시간 계속된 설명회에서 수험생처럼 책자를 열심히 읽고 밑줄을 그었다. 일부는 설명회가 끝난 뒤에도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얻으려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달라진 이민 풍속도
설명회 참가자들 중에는 “나는 ‘이민(移民)’을 가려는 게 아니라, 단지 이주(移住)를 준비할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른 나라에 가서 붙박이로 사는 게 아니라 1년에 6개월은 한국, 6개월은 필리핀에 사는 식으로, 자주 이사를 하듯 다양한 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일종의 ‘철새 이민’을 하겠다는 것이다.
주부 곽모(53·경기도 부천)씨는 “6개월 뒤쯤에 필리핀으로 갈 계획”이라며 “필리핀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1년에 세 번 정도 한국을 오가며 자녀들에게 영어 공부도 시키고, 운동과 레저를 즐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업을 접고 은퇴 준비를 시작한 최모(61·경기도 분당)씨도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과 동남아를 오가며 노후를 보낼 생각”이라며 “소중한 고향과 오래된 벗을 아예 떠날 생각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퇴자협회 김한결 이사는 “예전엔 노후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동남아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근엔 한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태국·필리핀 등지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긴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이민을 준비하는 것이 요즘 트렌드”라고 말했다.
◆단체로 ‘은퇴 이후’ 준비
단체로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30년 넘게 다니던 대학병원을 작년 2월에 퇴직했다는 권영갑(62)씨는 “친구들과 다 같이 동남아로 떠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마음에 맞는 친구도 없으면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민 컨설턴트 홍정렬씨는 “외로움은 은퇴 이민의 최대의 적(敵)”이라며 “육십 넘어 동남아 등지로 이민을 떠나면, 이국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함께 이민을 떠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이다.
◆“황제처럼 살 수 있나요?”
이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태국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는 김모(여·56)씨는 “한 달 생활비 200만원 정도면 가정부에 운전사까지 두고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설명회 측은 그러나 “200만원으로 황제 같은 삶을 살긴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광선 말레이시아 한인회장은 “동남아에선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자동차가 필수인데, 외국인에겐 차를 비싸게 팔다 보니 차 구입 비용이 한국의 3배나 든다”고 말했다. 이영백 필리핀한인회 회장도 “소형 아파트(약 1억2000만원), 자동차(약 1000만원) 등을 모두 장만했을 때를 전제로, 한 달 2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계산하는 것”이라며 “초호화판 삶을 누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찾아왔다간 낭패를 보기 쉽다”고 말했다.
◆고령 이민자가 주의해야 할 것
한국은퇴자협회 측은 이민을 준비하는 고령자들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소일거리를 삼을 만한 일자리는 현지에서 구하기 어렵고, 집도 외국인에게는 3배 가량 비싸게 팔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렵다”고 충고했다. 또한 동남아는 1년 내내 여름처럼 날씨가 덥고, 대중교통이 우리 나라에 비해 불편한 점도 고령자들이 감안해야 한다고 협회측은 설명했다.
문의는 (02)456-0308 (은퇴자 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