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 즈음에 개봉한 영화 '1번가의 기적'. 배우 하지원은 이 영화에서 맷집과 깡다구만으로 동양챔피언에 도전하는 여자 복서로 출연한다.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소녀 가장으로 표정 없고, 말수 없는 무뚝뚝한 복서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가 공개됐다. 바로 IFBA(국제여자복싱협회) 세계챔피언 김주희(21)씨가 하지원이 연기한 실제 주인공이란 사실이다.
김주희. 12전 10승1무1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IFBA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다. 키 160㎝, 몸무게 49㎏ 남다르지 않은 체격이지만 집중력과 끈기로 세계를 제패한 대한민국 대표 ‘악바리’다. 소녀가장 챔피언으로도 유명한 김 선수는 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요즘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 복싱판에 뛰어들었다. 비뚤어지지 않고자 하는 마음에 스스로 찾아갔던 복싱 체육관에서 풀어 던진 ‘한’은 매일같이 그녀로 하여금 샌드백을 두드리게 했다. 그리고 김 선수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2004년 세계 챔프에 올라섰다.
우리나라에서 챔피언 타이틀은 김주희 선수만의 것이 아니다. 항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재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여자복싱 세계챔피언은 김주희 선수를 포함해 무려 7명. IFBA 미니멈급 손초롱(20), IFBA 플라이급 최신희(24), IFBA 슈퍼플라이급 김지영(25), IFBA 스트로급 박지현(22), WBA(세계복싱협회) 여자 슈퍼플라이급 김하나(26), IFBA 슈퍼페더급 우지혜(20)까지. IFBA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11명의 세계 챔피언 중 6명이 한국 선수다. 손 선수는 작년 12월 WBA 여자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해 통합 챔피언이 됐다. 이에 비해 남자 챔피언은 작년 말 11개월 만에 타이틀을 되찾은 WBC(세계복싱평의회) 페더급 지인진(34) 선수가 유일하다.
‘왜’ 여자 챔피언 전성 시대인가. 복싱계에서 남자는 ‘지고’, 여자가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상권 성남권투체육관(손초롱, 최신희 소속) 관장은 “2003년 처음으로 여자복싱챔피언 타이틀을 딴 이인영 선수가 매스컴의 조명을 받은 것이 계기와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 챔프들의 프로 데뷔 시점은 이 시기와 일치한다. 이인영 선수보다 프로 데뷔가 빠른 김주희 선수(2001년 데뷔)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 모두 2003년부터 2005년 시기에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인영 선수가 세계챔피언에 오른 2003년 9월 프로로 데뷔한 최신희 선수는 “처음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프로에 뛰어든 것은 이인영 선수가 세계챔피언이 돼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면서였다”며 “하지만 처음부터 세계챔피언이 되려는 목표는 없었다”고 말했다.
# 남자 세계 챔피언은 1명뿐
최 선수의 경우처럼 선수들 대부분은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챔프의 꿈을 꾸진 않았다. 이는 1970~80년대 한국 남자 복싱의 황금기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흔히 말하듯 '배가 고파서' 운동을 시작한 선수는 김주희 선수가 유일하다.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남과 다른 운동을 하고 싶어서" "살을 빼기 위해서" 복싱을 시작했다고 한다. 최 선수는 학교 졸업 후 회사 생활로 70㎏까지 늘어난 몸무게를 줄이겠다는 욕심에 복싱을 시작했고, 김하나 선수도 체중감량이 이유다. 박지현 선수는 대학 신입생 시절 특별한 운동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러브를 꼈다. 복싱 선수 중 마이크 타이슨을 가장 좋아한다는 김하나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오다가 대학 입학(용인대 유도학과) 후에 쉬다 보니 몸무게가 부쩍 늘어 복싱을 선택했다"며 "당기는 운동인 유도와 반대로 미는 운동인 복싱을 이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연소 세계 챔피언 손초롱 선수도 마찬가지. 고1 무렵 한 친구가 합기도를 배운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 권투한다"는 말이 하고 싶어 복싱을 시작했다. 이후 운동에만 집중해 챔피언까지 된 것은 오로지 '재미' 때문이었다. 손 선수는 "프로 선수가 된 후 연습량도 많아지고 기대치도 높아져서 몸은 더 힘들다"며 "그러나 이만큼 보람차고 재미있는 운동도 없다"고 했다. 복싱을 언제까지 할 거냐는 질문에, 손 선수는 "다른 재미있는 일이 생길 때까지"라고 대답했다. 이른바 복싱에 '목숨'걸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어떻게 한국 여자 복싱은 7명이나 세계챔피언을 양산(量産)할 수 있었을까. 해답의 열쇠는 '선수층'에 숨어있다.
# 여자 프로선수는 모두 합쳐 80명
남자 복싱과 달리 여자 복싱은 선수층이 얇다. 세계적으로 복싱을 즐기는 여성이 많지 않고, 하루 10시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프로선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3월말 기준 한국권투위원회에 등록된 여자 프로 복싱 선수는 80명. 남자 프로 선수는 지금도 422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80년대 남자 복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1000여명에 육박했다.
현재 IFBA 세계 랭킹 순위를 보면 각 체급별 10위 선수 명단조차 비어있는 경우도 있다. 박지현 선수가 랭크되어 있는 스트로급의 경우 8위에서 10위까지가 공석(空席)이다. 복싱 전문가들은 “세계 10위 안에 든 선수라도 함량 미달 선수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김주희, 최신희, 손초롱 선수의 프로모터인 황기 성남프로모션 대표는 “여자 복싱은 전세계적으로도 괜찮은 선수가 많지 않다”며 “멋진 시합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하고 싶어도 외국에서 큰 돈 주고 데려올 만한 선수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12전10승(3KO)1무1패를 기록하고 있는 김주희 선수를 제외하곤, 나머지 세계챔피언들은 10회 미만의 경기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프로로 데뷔해 정식 시합을 열 번도 못 하고 세계챔피언이 됐다는 뜻이다. 최신희 9전8승(4KO)1패, 손초롱 8전8승(3KO), 김지영 8전7승1무, 김하나 8전7승(3KO)1패, 박지현 7전6승(4KO)1패, 우지혜 7전6승(1KO)1패의 기록이다.
1990년대부터 남자 복싱은 급속히 인기를 잃어갔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K-1과 같은 이종격투기의 흥행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체육관 관장들은 큰 뜻 없이 도장을 찾은 여성 중 재목을 골라 프로 선수로 길러냈다. 남자 챔피언보다 쉬운 여자 세계챔피언을 양성해 새롭게 복싱 시장의 부흥을 노렸던 셈이다.
이를 위해 세계 여자 복싱 메이저 기구 중 하나인 IFBA를 집중 공략했다. 미국, 캐나다, 러시아, 독일 등 유럽 체형의 여자 선수들이 활약하는 WIBA, WIBF, IWBF 등을 피해 IFBA 세계 챔피언을 만들어냈다. 우리보다 여자 프로 선수가 많고, 일찍 여자 복싱이 자리잡은 나라와의 경쟁을 피한 것이다. 이 덕에 이인영, 김주희, 최신희, 손초롱 선수 등 비교적 빨리 챔피언에 등극한 선수들은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 복싱 경기는 근본적으로 남자에 비해 파워나 스피드 면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여기에 함량 미달의 선수들을 키워 시장에 내보낸 탓에 '아기자기하지만 강렬한' 복싱을 바랐던 관중들은 경기 내용에 실망해 서서히 등을 돌렸다.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종격투기가 계속해서 인기를 얻어갔고, 전직 씨름선수 최홍만, 이태현을 비롯해 전직 유도선수 출신의 윤동식, 김민수, 추성훈과 프로복싱 챔피언인 최용수까지 뛰어들면서 이종격투기를 제외한 다른 격투기는 현저히 몰락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자 복싱은 프로스포츠의 기본인 '머니(money)'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자 복싱이 흥행이 될 거라는 판단으로 투자에 나섰던 프로모터들도 자금 문제로 허덕였다. 이전처럼 방송 중계권료를 받지도 못하고, 누구 하나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기업도 없었다.
남자 복싱 부흥기 때만 해도 방송만으로 1~2억원의 중계권료를 받았고, 후원하게 해달라고 조르는 기업들도 넘쳐났다. 반면 여자 복싱은 초반 열기가 식으면서 기업들의 후원이 사라져 챔피언이라고 해도 1년에 두세 차례 경기 일정 잡기도 힘들다. 챔피언들 역시 한 시합당 1000~2000만원 수준의 대전료 수입만으로 큰 돈 벌 욕심을 가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황기 대표는 "이렇게 가다가는 1~2년 안에 챔피언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여러 기업들의 후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여자 챔피언들은 '링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복싱을 하려면 많은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 경기 때마다 복부를 심하게 가격 받다 보면 신체 장기 손상이 일어난다. 특히 여자 선수는 자궁이 다칠 수 있어 의사들은 오랜 기간 복싱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현 챔피언들 역시 계속해서 복싱만 할 생각은 없다. 결국 지속적으로 챔피언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수를 발굴, 육성해야만 한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다.
프로권투체육관협의회 황인규 여자권투분과 위원은 "여자 복싱 활성화를 위해 지금까지 쉽게 챔피언만 양산해온 것이 사실이다"면서 "동남아시아권에서 우리나라가 선두주자로 주도하다 보니까 기회도 많고 시합도 많았지만 여자 복싱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을 높이진 못했다"고 말했다.
이전과 달리 복싱 체육관을 찾는 사람들의 40~50% 가량이 여성이지만, 체계적인 여자 선수 육성에 힘쓰진 못했다는 지적이다. 고양시복싱연맹 김형열 회장은 "복싱이 인기종목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것에만 매달리는 프로다운 프로가 나와야 하는데 여자 복싱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