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337표, 반대 224표 입니다.”

마이클 마틴(Martin) 하원의장 앞에서 의회 서기(書記)가 개표 결과를 발표하자 일제히 “와!” 하는 탄성이 울려 퍼졌다. 팽팽한 긴장감과 열기가 한꺼번에 터지는 듯 했다. 박수를 치고 볼펜, 종이쪽지를 들어 돌리며 환호하는 등 크게 술렁거렸다. 일부는 못마땅했는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지난달 7일 저녁 7시 런던 빅벤(Big Ben) 옆 의회의사당 하원(下院)에서 정치 빅뱅(Big Bang)이 일어났다. 영국 의회 700년 전통을 깨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원이 ‘귀족의원(貴族議員)’을 없애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날 하원은 한 번 귀족으로 임명되면 죽을 때까지 귀족 칭호를 들으며 의원 노릇을 하는 상원(上院)의원을 100% 국민 손으로 뽑기로 합의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초당적 지지로 역사의 새로운 서막이 올랐습니다.”

잭 스트로(Straw) 하원 대표는 흥분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하원에 대부분의 의원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투표결과를 서서 지켜본 의원도 많았지만 모두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영국 하원은 실제 의원 수(646명)보다 적은 437석만 마련돼 있어 전체 회의를 하면 국회의원이라도 비좁게 끼어 앉거나 서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리가 넉넉해 빈 자리가 자주 눈에 띄는 상원과 대조적이다.

하얀 족제비털을 목 주위에 장식한 빨간 고급 벨벳 가운으로 평민과 여전히 대비되는 귀족집단 ‘영국 상원’. 그러나 가장 민주적인 나라에서 가장 비(非) 민주적인 선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그들이 이제 수술대에 올랐다.

상원 개혁은 토니 블레어(Blair) 노동당 정권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레어는 1997년 집권과 동시에 세습귀족의 상원 투표권을 폐지할 것을 약속하며 일대 혁신작업에 나섰다. 상원은 20세기 들어와 하원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뺏기고 세습귀족 이외에 임명직 귀족 참여가 허용되는 등 종전 세습귀족 중심 거대권력의 형태를 벗어났다. 그러나 블레어 정권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원에 메스를 대기로 했다. 첫 번째 대상은 세습귀족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1999년 11월 11일 오전 11시. 당시 660여명의 세습귀족들은 개정 상원법을 발표시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가가 떨어진 이날 11시를 기해 모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바로니스 제이(Jay) 상원 대표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며 시대의 흐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하게 심경을 밝혔다. 더욱이 이날은 ‘세계 1차 대전 종전(終戰) 기념일’이었다. 당시 상원의 모습을 보여주던 국회 내 TV에는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상원의 운명이 바뀌는 이 사건을 기억하자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것이었을까. 이 날로 세습귀족은 92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이 사건은 그러나 은밀한 거래로 성사됐다. 블레어 총리와 상원 보수당 대표인 크랜본(Cranborne) 의원간의 극적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 크랜본 의원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세 번이나 총리를 맡은 로버트 세실(Cecil)경의 4대 손으로 영국 최고 정계집안 자손이다. 그는 상원 개혁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보고 세습귀족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일부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블레어로부터 92석을 보장 받게 된 것이다.

보수당은 발칵 뒤집혔다. 사실을 알게 된 당시 보수당수 윌리엄 헤이그(Hague)의원은 분을 이기지 못해 모든 상원들이 보는 앞에서 크랜본 의원을 상원 대표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타협된 개혁안은 돌이킬 수 없었다. 오히려 헤이그 당수의 경솔한 행동에 분노하는 의원들이 그림자 내각(야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각료 후보로 조직한 내각) 전원 사태파동을 일으켰다. 여당의 상원 개혁 불똥이 엉뚱하게 야당에게 튀어 야당 스스로 분열양상을 빚게 된 것이다.

하지만 블레어도 내홍(內訌)에 빠져 2차 상원 개혁은 실패하게 된다. 블레어는 92석을 제외한 나머지 상원의석을 처음에는 종신 귀족제도나 선거를 활용해 충원하려 했다가, 하원이 상원을 압도하면 하원의 견제가 극심해질 것을 걱정해 전원 임명 방침으로 돌아섰다. 이는 하원대표였던 로빈 쿡(Cook)이 선호했던 전원 선출방식과 정면 대치되는 것이었다.

블레어 정권 초기 외무장관이었던 로빈 쿡은 대미관계를 놓고 블레어와 견해차를 보였다가 하원의장으로 전출돼 가뜩이나 블레어와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는 즉각 “블레어가 상원을 자기 입맛에 맞게 구성하려 한다”고 맹비난하고 블레어 통치 스타일에 대해서도 “소심하고 관료적이다”고 비판했다. 총리와 하원대표간 갈등은 자중지란으로 발전했고 결국 2003년 하원에 상정된 상원 개혁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로빈 쿡은 같은 해 영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사의를 표명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영국 성공회와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도 2차 상원 개혁 실패의 단초가 됐다. 2002년 7월 상원 개혁을 위한 공동 위원회에 성공회 주교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케레이(Carey) 켄터베리 대주교는 “상원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에 성공회를 배제시키고 있다”며 “상원에서 성직자 의원을 제외시키려는 첫 시도이며 더 나아가 영국 성공회를 해체시키려는 저의”라고 혹평했다. 대주교는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인들처럼 행동한다”등의 비판을 받았지만, 위원회는 주교들의 상원 의원직 처리방식을 결정짓지 못했다. 자칫 영국국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비춰질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상원의원 전원 선출직 전환을 골자로 한 이번 개혁안은 그러나 블레어 총리의 의중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블레어는 당초 정부가 제출한 상원 개혁안(폐지안, 현행 유지안, 의원 20%·40%·50%·60% 선출안) 가운데 현행유지안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하원이 이번 표결에 앞서 이틀 동안 논의한 것은 100% 선출안으로 훨씬 진전된 방안이었다.

이번 하원의 놀라운 결정에 대해 영국 정계에서는 상원의원직 지명을 둘러싼 정치자금 스캔들의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 진상은 이렇다. 지난 200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2명의 기업인들에게서 1400만파운드(약 260억원)을 모금했고 이 중 네 명을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블레어는 “재정적 지원에 관계없이 상원의원직에 지명된 사람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며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는 이유가 의원임명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상원에 인준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원인준이 거부됐다.

이 스캔들로 선거기간 중 장관 대부분이 경찰조사를 받았다. 자금모집책이었던 레비(Levy) 의원도 두 번이나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블레어 스스로도 작년 12월, 올 1월 두 차례 조사를 받아 역대 현직 총리 중 처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이번 상원개혁을 주도한 잭 스트로 하원대표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블레어와 맞섰던 로빈 쿡 전 대표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잭 스트로는 로빈 쿡이 외무장관에서 하원대표로 밀려나던 2001년 개각 당시 로빈 쿡의 자리를 물려받아 외무장관에 발탁됐다. 외무장관은 재무장관에 이어 당내 서열 2위 자리다.

잭 스트로는 블레어, 고든 브라운(Brown) 재무장관, 존 프레스콧(Prescott) 부총리 등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무슬림이 많이 사는 블랙번 지역의원인 잭 스트로는 “재임기간 중 이란 공격은 반대한다”고 선언해 블레어의 심기를 건드렸고, 블레어는 지난해 지방선거 참패 이후 개각을 통해 잭 스트로를 하원대표로 전출시켰다. 마침 상원 개혁이란 중책을 맡은 잭 스트로는 로빈 쿡처럼 블레어를 직접 비난하지 않았지만 블레어가 별로 원치 않던 100% 상원 선출직 전환에 엄청난 공을 들였고 결국 승리했다.

상원은 하원 결정 이후 일주일 뒤인 지난달 14일, 예상대로 하원 결의안을 거부했다. 361표 대 121표로 현재의 전원 임명체제를 유지키로 결의했다. 보수당 상원대표 스트래트클라이드(Strathclyde) 의원은 “어설픈 개혁 따위는 필요 없다. 그대로 두고 보지 않겠다”고 하원에 경고했다. 그러나 상원 일각에서는 하원 결정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다. 자유민주당 맥낼리(McNally)의원은 “역사적 개혁을 무조건 거부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개혁이야말로 국민들이 원하는 바”라고 했다.

상원 개혁법안은 차기 총리로 유력한 브라운 재무장관 몫으로 남게 됐다. 브라운 장관은 그러나 이번 하원 투표에서 ‘선거 80% 방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높이 106m, 시침 길이 2.7m, 분침 길이 4.3m의 대형 탑시계‘빅벤’이 위용을 자랑하는 영국 의회의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