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金日成·1912~1994)은 어떻게 그렇게도 오랜 기간 동안 1인 독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김일성 일파가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자력 혁명 발전론’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유격대 국가론’이라는 개념으로 김일성의 빨치산파(派)가 경쟁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통일연구원이 지난 2002년부터 3년 동안 체계적으로 수집한 해외의 북한 자료들은 무척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서재진(徐載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소련 군정에 참여했던 중요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논문 ‘항일무장투쟁과 소련의 김일성 수령 만들기’를 최근 단행본 ‘해외자료로 본 북한체제의 형성과 발전 I’(선인 刊)에 기고했다. 그 요지는 “김일성의 일당독재와 개인숭배는 소련의 기획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2002년 12월 31일 평양 시민들이 김일성 동상 앞에 꽃바구니를 바치고 있다.

1945년 광복 당시 소련은 북한에 친소 정권을 수립하려 했지만, 북한은 동유럽과 달리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련 내의 한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동시에 김일성을 최고 지도자로 선발했다. 1945년 9월 초 그를 직접 면접하고 ‘낙점’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안정된 지도자 자리를 굳혀주기 위해서 소련은 스탈린을 본뜬 김일성의 개인숭배 정책을 정권 초기부터 추진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을 때 ‘조선인민의 영웅’으로 부각시켰고,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수령’ 칭호를, 1952년 40세 생일 때 ‘원수’ 칭호를 붙였다.

북한 내 ‘소련파’였던 정상진(86)씨는 “당시 소련파들이 소련 대사관에 가면 반드시 ‘김일성을 잘 받들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또 북한 진주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관을 지낸 레베제프는, 당시 북한 언론을 장악한 소련 군정이 “김일성을 항일 민족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긴급한 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방송 시작과 종료 때 반드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틀 정도였다는 것이다.

서 위원은 “오늘의 북한을 있게 한 뿌리는 소련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을 모두 소련이 육성했으며 친소 정권에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민족해방의 논리를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