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쪼시가 좋은 날이다. 세수를 하고 난닝구, 빤스위에 메리야스 내복을 입으니 어머니께서 아침밥상을 들여오셨다. 작은 아버지는 오늘 관공서라도 가시는지 와이샤쓰에 조끼에 즈봉에 가다마이로 쭉 뽑으셨다.’ 1960년대 초 초등학교 3학년이 쓴 일기입니다. 문장 하나에 일본어 또는 일본식 발음이 두세개씩 튀어나옵니다. 면내의를 가리키는 ‘난닝구’는 영어 ‘running’ 의 일본식 발음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running shirt’였는데, 말 줄이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의 언어습관 탓에 ‘난닝구’(running)만 살아남았다고요. 와이샤쓰도 영어의 화이트 셔츠(white shirts)에서 일본사람들의 생략 버릇으로 ‘트’가 사라졌답니다. ‘흰 셔츠’라는 뜻이지요.
‘야생초편지’를 쓴 황대권(52)씨가 이번 주 펴낸 ‘빠꾸와 오라이’(도솔오두막)를 읽다보면 독자에게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 많습니다. 1960년대 서울 행당동 언덕배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의 체험이 앞뒤로 비슷한 세대들의 어릴 적 기억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씨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13년 2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1700쪽 일한사전을 첫 장부터 샅샅이 읽으며 우리말 속 일본어 240여 개를 추려냈다고 합니다. 그리곤, 이 말을 우리 말처럼 썼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풀어냅니다.
어린아이에게 “찌찌 먹을래” 할 때의 찌찌는 젖을 뜻하는 일본어이고,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볼 적에 흔히 하는 ‘호구’도 일본말 ‘호고’(反故·휴지나 소용없는 물건)에서 왔답니다. ‘보루박스’도 영어 ‘board box’의 일본 발음이랍니다. 40여 년 전 썼던 말을 요즘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언어란 정말 생명력이 질긴 모양입니다. “정말 그럴까” 싶은 대목도 있지만, 어린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