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 여름 더위를 이기는 한 가지 방편은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 가옥 안에 찬 바람을 끌어들이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집안 안마당에 나무를 심지 못하게 한 건 바로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전통 한옥을 보면 뒤란에는 나무와 화초를 심어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해 놓았다. 대신 안마당은 나무를 심지 않아 뜨거운 구조다. 안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아 햇볕에 땅이 데워지면 가벼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 빈자리에는 뒤란에서 찬 공기가 이동해 온다. 대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청마루에 앉은 사람은 뒤란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쐬게 된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연구팀에선 그 가설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실험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실험 대상으로 충남 논산에 있는 윤증(尹拯·조선 중엽 학자) 고택을 찾았다. 실험 기간은 1년이다. 다짜고짜 남의 살림집에 들어가 실험해 보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람과 온도를 측정하겠다고 살림집 대청과 안마당, 뒷마당에 실험 장치를 늘어놓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 문제는 학생이 해결했다. 나는 그 비결을 모른다. 다만 열심히 가서 취지를 설명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그 학생에게 물어봤는데 자신의 고향과 부모님이 전달하신 가르침의 인연이 고택의 어른들과 친숙해지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는 회고담을 보내 주었다. 결국은 전통과 맥이 닿아 있었던 그의 삶이 주요한 밑거름이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윤증 선생의 후손과 연세 많은 할머니, 그리고 며느님은 우리 실험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우리는 1년의 자료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필요한 부분을 뽑아 분석했다. 나무가 없는 안마당의 뜨거운 공기는 위로 상승했으나 결과는 우리 기대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뜨거운 여름날 안마당 공기가 상승해서 빈자리에 고택의 열어 놓은 대문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 것이다. 뒤란의 바람은 안마당으로 옮겨갈 힘이 부족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대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잠잠해지면 뒤란의 바람이 안마당으로 풀무질하듯 짧고 세게 불었다. 그것이 대청에서 느끼는 시원함의 원인이었다. 이 실험을 하면서 윤증 고택에는 부엌에서 나오는 냄새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구조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엌 옆에 이웃 건물을 바투 붙여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유체(流體)의 통로가 좁아지면 그 흐름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베르누이 정리가 적용된 것이다.

이렇게 저질러 본 경험으로 나는 몇 가지 다른 수확도 얻었다. 먼저 학생은 그 일을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장학금을 약속하고 데려갔다. 나이든 할머니를 후원자로 얻는 열성과 겸손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또 하나의 수확이라면 현지의 감각과 과학을 연결하는 길이 전통에 대한 한 가지 공부 방법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통을 들려줄 한가한 현지인도 별로 없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전통은 너무 멀리 있다. 그들이 가진 판단의 잣대는 감각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여져 있는 객관성이다. 그런 사정이니 과학이 결코 전부일 수 없어도 전통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