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두 숭문고 교사·‘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이해하지 못하면 걸림돌. 감당할 수 있다면 디딤돌. 이러한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진 것이 바로 개념어다. 어떤 분야든지 개념어로 압축되고 개념어로 다시 폭발한다. 이를테면 지그문트 프로이트하면 ‘무의식’, 토마스 쿤하면 ‘패러다임’ 식으로 모든 논의가 귀결되고 새롭게 사유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개념어를 풍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인문사회적 텍스트 읽기·쓰기의 기본이다.

이러한 개념어를 똑 소리 나게 자기 것으로 만들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인문 사회 분야의 경우에 개념어들이란 문명의 역사를 여는 강처럼 유구한 흐름(시간적 축적)과 광대한 범람(공간적 전개)의 성과물이다. 게다가 거대한 강들이 서로 섞여 들기에 어디가 본류이고 지류인지, 상류와 하류는 어디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앞서 고민하고 체득한 이의 조언은 요긴하고 또 요긴하다.

〈개념어 사전〉은 번역가이자 저술가인 남경태가 그간의 작업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식견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는 인문 사회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이해와 사유를 바탕으로 개념어들을 설명한다. 일반적인 사전이 객관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풀어내는 것과는 달리 철저히 남경태 프리즘으로 비쳐낸 개념어 풀이 모음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책에 대해 “설명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깝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편향적이고 주관적’이다.

“이 책에는 상식도 없고 정보도 없다. 게다가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힘써 외워뒀다 써먹을 만한 미려한 문장도 없다. 한마디로 사전이 갖춰야 할 어떠한 미덕도 없다. 대신 이 책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종횡무진 초원을 누비듯이 한 개인이 지적 세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겪고 부딪힌 개념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렇듯 남경태판 개념어 사전은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이다. “각 개념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애쓴 덕분에 읽는 데 별로 부담이 없다. 첫 표제어인 ‘가상현실’의 풀이만 해도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야반도주한 사건, 1950년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며 국민을 속이고 한강 인도교를 끊고 도망친 사건을 언급하면서 1991년 걸프 전쟁이 ‘가상 전쟁’이라는 현대전 양상을 명확히 보여주었다며 풀어간다.

개념어에 대하여 풀이할 때 부연과 확장, 요약과 생략 등 자유분방한 저자의 서술 태도는 이 책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아는 것 많은 데다가 입심까지 좋은 선배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시각에서 개념어들을 가능한 한 재미있게 알려주는 식이다. 딱딱한 사전식 풀이는 졸다가 들으면 귀가 쫑긋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보드리야르의 개념인 시뮐라크르(모방), 인터넷 게임의 무기나 아이템 판매 현실, 1980년대 윌리엄 깁슨의 SF 소설 〈뉴로맨서〉, 중국 고대 철학자인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 등 동서고금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하게 예로 든다. 실제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는 가상 현실에 대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표제어인 ‘환경’까지 그가 다룬 표제어들은 모두 153개. 근본주의와 담론, 동일자/타자, 물신성, 사회구성체, 신자유주의, 아니마/아니무스, 키치, 트라우마, 포스트모더니즘 등 인문 사회 분야 텍스트를 읽는 데 자주 나타나는 개념어들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꼭 그만큼이나 다양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다가 어려운 용어가 나오면 책을 꺼내 뒤적이면서 읽는 방법.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꼼꼼하게 읽는 방법. 인터넷 백과사전과 비교/대조하면서 읽는 방법. 표제어와 내용을 철저히 분석하면서 읽는 방법. 참고 문헌에 소개된 책들을 철저히 찾아 읽는 방법. 관련 사진이나 도표 등을 철저히 찾아 덧붙이며 읽는 방법.

단순 설명을 넘은 저자의 주장(“독도의 소유권은 역사적 문제가 아니며, 역사와 별개로 관련 국가들의 현재적 입장에 의거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에 반박하며 메모하며 읽는 방법 등. 오, 이걸 표제어로 덧붙였으면 좋겠다.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해 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읽는 순간, 읽기는 곧 쓰기다. 읽기와 쓰기는 무한 순환하며 나는 끊임없이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