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 태종은 청군(淸軍)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는 15일 새벽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실록에서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산길이 얼고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했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으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왔다'라고 적은 대로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 한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 장소로 적당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비를 맞아 젖은 가운데 심하게 얼었다'라고 쓴 것처럼 동사자(凍死者)가 잇따랐다. 기다리던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인조는 이듬해 1월 30일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청나라는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고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짓게 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인조실록'은 국왕이 강권하자 "세 신하가 마지못해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거칠게 지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했다(15년 11월 25일)"라고 전한다. 청나라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 중에서 이경석의 글을 고쳐 사용하라고 명했다.
인조는 이경석에게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난다"라며 고칠 것을 명했다. 이경석은 일부를 고치고는 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소절(小節)을 버린 것이다.
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스프레이로 훼손한 범인이 체포됐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비문을 청와대나 국회 등으로 옮기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삼전도비는 숭명반청(崇明反淸)이란 사대주의 이념에 경도되어 나라를 망쳤던 한 시대에 대한 교훈으로 우리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입력 2007.03.01. 22:37업데이트 2007.03.0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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